▲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 예전 어느 여배우가 TV광고 속에서 깜찍한 얼굴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그 광고를 보면서 문제 있는 남자를 개조시키거나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능함과 자괴감에 많은 여자들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역사는 남자가 바꾸지만 그 남자를 바꾸는 것은 여자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한국사회는 남녀 간 애정문제나 부부간 화합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여성으로 귀결시키는 인식이 있다. 남자가 아무리 괴물이라도 여자만 잘 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연애나 결혼관계가 평화롭게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나 고전에도 천하의 망나니 같은 남자가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을 만나 환골탈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어쩌면 고증되고 입증된 여자의 역할이고 능력인지 모른다.

지구상의 수많은 남녀가 마음이 맞고 눈이 맞아 짝을 찾고 연인이 된다. 그들의 관계는 어떤 목적이나 계산 없는 따뜻함과 너그러움이 매개가 된다. 하지만 요즘, 그런 남녀의 연애 과정 중에 때리고 감금하는 데이트폭력이 새삼 화두가 되고 있다. 그 양면성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행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남자는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사랑의 다른 형태라고 하고 당하는 여자도 그 이유에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견뎌내는 것 같다. 아니 ‘나만 잘하면 그치고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까지 한다. 한두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여자는 오히려 자책을 하고 급기야는 내성을 갖는 지경까지 된다. 심리학적으로는 스톡홀름 신드롬(인질이 인질범에 동조하는 심리)이라고 명명한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본인들의 몫이며 그 연애가 이어지는 과정은 조금 비밀스러운 것이 묘미다. 그러다보니 그 과정 중에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조언을 받고 도움을 받기는 쉽지 않다. 철저하게 개인이 혼자 해결해야하는 불가침不可侵영역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렇게 혼자 견뎌야 하는 것으로 알고 두루뭉실 대처하다보니 결국 드러났을 때는 이미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다.

시인 예이츠가 말한 것처럼 ’사랑은 느닷없이 당하는 일격’으로 시작했지만 ‘끔찍하고 잔인한 물리적 일격’에 그들의 사랑은 처참하게 끝난다. 그러다보니 이젠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보다는, 이별을 안전하게 한 사람에게 ‘축하 한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 지경이 됐다. 단순히 시대적인 조류의 반향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결혼제도 밖에 있는 남녀의 만남과 사랑은 아무도 관여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라서 어쩌면 그 이면의 아픔은 더 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젠 스토킹 당하지 않고, 감금당하거나 얻어맞지 않고, 사진이나 동영상 유출 협박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안전하게 이별하는 법까지 공부해야하는 지경이다.

바라만 봐도 좋고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사랑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 맘에 차지 않고 내 뜻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몸에 폭력을 가하고 상대방의 시간에 침입해서 고통을 주고 불이익을 주는 데이트폭력의 양상. 그러다보니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게 됐다. 무사한 이별이 사랑의 시작보다 먼저 익혀야하는 생존의 방법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나’를 버리고 희생하는 사랑의 위대함에 전율했던 남녀에게도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이별이 올 수 있다. 그 사랑의 끝에서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 미덕까지 발휘해야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사랑의 서막과 과정과 마무리는 상대방에 대한 희생과 배려와 행복이 아니던가.

삶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 연애마저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벽을 두어야 하는 현실. 사랑의 이름 뒤에 폭력이 있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삶은 절망이다. 그래도 영원불멸한 아름다움은 남녀의 사랑이고 그 사랑 속에서 파생되는 행복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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