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올 초 지인에게서 수첩 한권을 새해 선물로 받았다. 금융기관에서 중요고객에게 표지에 개인의 이름을 새겨준 것이다. 세상에 한 개밖에 없는 귀한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면서 깨끗하게 오래 보관하리라 생각하며 표지의 이름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마치 한권의 책처럼 책장에 조심스레 꽂아두었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여기저기서 고급스럽게 꾸며진 다이어리를 달력과 함께 선물 받는다. 많을 때는 서 너 권도 된다. 첫 장을 펼칠 때는 언제나 빼곡하게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지 다짐을 하건만 정작 해가 다 가도록 앞장 몇 페이지 말고는 거의 빈 공간으로 있기 일쑤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수첩에 무언가 가득 채워 넣는 사람이 많이 부럽다. 언제나 기록하고 칸을 채운다는 것은 그만큼 하루하루 충실히,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는 증거일테니까. 하지만 나는 무슨 배짱인지 아직도 수첩에 기록하기 보다는 내 머릿속에 저장해 두려는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저장능력에 한계를 느낀다.

결혼하고 몇 년 동안은 빠짐없이 가계부를 적었다. 몇 십 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적어 넣어서 나름 알뜰한 살림꾼 흉내를 냈다. 가계부는 금전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칫 잊어버릴 수 있는 집안의 대소사나 일정을 끄집어내고 챙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게 되자 사부작사부작 끊겨 버렸다. 요즘 간혹은 다시 시작해 볼까 싶지만 한 번 깨지고 흐트러진 것을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메모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가방에 수첩 한 권은 필수로 넣어 두고 수시로 메모하고 적어야하는 게 습관이 되어야 하는 실정이다. 길을 걷다가 또는 밥을 먹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문장 한 줄, 단어 한 개가 가슴을 칠 때가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수첩에 적기 보다는 머릿속에 저장을 한다. 한 때는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놀라워 할 기억력을 가졌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은 전두엽 부신피질의 기능저하라는 부작용을 가져왔고 이젠 돌아서는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다.

지인 중엔 수십 년 동안 써 온 다이어리 여러 권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날그날 본인의 스케줄은 물론 소소한 모임의 일정, 그리고 책을 읽다가 발견한 좋은 글귀를 빼곡하게 적어 두기도 하고 심지어 길을 가다 들었던 노래의 제목까지도 적어 두었다. 감회에 젖어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데 얼마나 감탄스러운지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 사람의 성실한 삶의 단편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본 듯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요즘은 손으로 쓰는 것보다 컴퓨터 자판을 이용해서 생각을 기록하고 감정을 남기고 인쇄한다. 자판키 한번 누르면 몇 백 장도 순식간에 전송하고 인쇄한다. 또 내용수정이나 삭제도 마우스 한번 움직이면 몇 초면 끝낸다. 손으로 기록하고 쓰는 일이 희귀한 일이 돼버렸다. 아니 미련하고 답답한 일이다. 밤새워 썼다 아침에 찢어 버리는 손편지의 다정함과 애틋함은 이제 유물 같은 일이다. 편지는 메일, 즉 전자우편을 이용해서 단시간에 전송해버린다. 우체국, 우표, 빨간 우체통, 우편배달부는 아련한 시어가 된지 오래다. 오랜 시간 감정을 거르고 마음을 추슬러서 손으로 또박또박 쓰는 건 시간낭비다. 그래서일까. 사람과의 관계도 그만큼 간단하고 가벼워져 버린 것이 아닐까싶다.

선배 문인들은 요즘 컴퓨터의 편리함과 효용성을 놀라워하면서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 또는 연필로 한자 한자 칸을 채우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씀 하신다. 진정으로 글 쓰는 맛이 있었다고 말한다.

가을은 감성이 폭발하는 시기다. 좋은 시도 많이 떠오르고 감성적인 글 한 줄에도 마음이 정화되는 때다.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무언가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다. 이 때 정성스럽게 손글씨 편지라도 쓰고 또 누군가에게 받으면 그 감동은 배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그것을 어느 곳에 표현하고 적는다는 것은 근사한 우리 삶의 장식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빈 공간으로 있는 파란 수첩이 장식처럼 책꽂이에 꽂혀 있다. 살며시 끄집어내서 펼쳤다. 페이지마다 하얀 여백이 스산하기까지 하다. 그 수첩을 선물한 사람도 전시용으로 꽂아두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 수첩에 오늘을 사는 내 삶을 빼곡하게 기록해야겠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사소한 것부터 내 깊은 사유의 끝에서 정제된 문장 한 줄이라도 소중하게 적어야겠다. 나는 오늘, 지금 이 순간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살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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