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옹윤례.
[검경일보 객원 필자 기고/ 소설가 옹윤례] 청바지를 입은 그가 하얗게 웃는다. 웃어야 할지, 인상을 써야 할지 표정에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나를 지나쳐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의 어깨에 팔을 얹고는 사라진다. 그가 아니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군복에 카메라가방을 맨 그가 손짓한다. 나는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빨간 모자를 쓴 여자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을 툭 친다. 그들은 가볍게 껴안은 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또 아니다.

낯선 남자가 모두 그로 보인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다시 안도의 숨.

열 한 번 째 쯤 일까? 이제는 안속아, 하면서 안경을 쓴 남자를 보지 않고 어깨너머로 차 한대가 멈추는 걸 바라본다. 은빛 승용차, 거짓말처럼 그가 클락션을 한번 울리더니 손짓을 한다. 아니야. 또 잘못본거야. 환청에다 이젠 환영까지 보이는 걸까? 그동안 너무 잠을 못 잤어. 먹지도 않고, 오랫동안 무덤 속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 것 같아.

빵빵---

클락션이 더 크게 울린다. 나는 은빛 승용차 너머로 키가 큰 남자를 본다. 그였다가 아니다. 빵빵.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 한 번 환청이 들리는 걸까? 은빛 승용차는 부드럽게 내 앞으로 미끄러져 다가와 멈춘다. 창문이 열리고, 그가 내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몇 번이나 불렀는데 듣지도 못하고..."
그의 웃음이 너무 눈부셔 눈을 가늘게 뜬다.
누구 찬데? 내 차야. 언제 뽑았어? 일주일 전에. 자랑하려고 나 불렀나보구나. 하하하.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편의점에서 콜라병을 들고 나오던 소녀가 쳐다본다. 어디로 갈 건데? 일단 타.
나는 차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갈까? 그가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란 책을 뒤적거리며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알아 맞춰볼까?......장흥 조각공원, 광릉수목원, 산정호수, 양수리......"
그가 놀랜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소설책에서 봤어. 주인공 남자가 차를 처음 뽑아서 방금 말한 곳들을 다니더라고."
"넌 아직도 소설 속에 나온 이야기만 하는구나."
내가 피식 웃는다.
"장흥으로 가자. 별로 멀지도 않고 한번 가려던 참이었어. 어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장흥조각공원에 있는 타르소를 보러 가는 게 나와. 그래서 나도 가보고 싶었어."
"타르소가 뭔데?"
그가 물었다.
"얼굴과 팔 다리가 없이 몸체만 있는 조각. 그런데 그 조각 제목이 뭔 줄 알아? 욕망의 무한대래."

그가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란 책을 덮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그의 탐스런 말을 타고 시원하게 뚫린 길을 거침없이 달리고 싶었다.

안개가 잔뜩 낀 거리는 시야가 잔뜩 흐려져 있고, 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걷혀진 듯 했지만 그만한 공간으로 다시 안개에 휩싸였다. 비 맞은 겨울나무들이 고사목처럼 지친 모습으로 음울하게 서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5시 10분. 겨울 해는 금방진다. 어쩌면 서울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어두워질지 모른다. 제발 길을 잘 못 들어 헤매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차가 굴레 방 다리에서 신촌 로터리까지 오는 도중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난주에 강화도에 새를 찍으러 갔어. 새벽부터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결국 찍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어. 이번 일요일 날 다시 갈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새를 찍는다고? 왜?"
"왜라니? 그냥 새가 좋아서 찍는 거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었어. 다음 달에 전시회를 여는데 그때 출품할 예정이야. 그때 와줄래?"
"우리 영원히 만나지 말기로 하지 않았던가?"
"일 년에 한번 씩 만나면 안 될까?"
"난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아."
"영원한 건 없다고 너 가 그랬잖아."
"......"
"넌 아직도 날 미워하는구나."
그의 얼굴에 있는 웃음기가 어느새 쏙 빠져나가고 없다.
"아니. 미워한 적 없어."
그가 카세트를 꺼내 튼다.
갑자기 차안에 가득 넘치는 음악소리. 뻐꾸기소리, 뜸부기 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와 함께 징소리, 북소리 같은 음악이 어우러진다. 내가 카세트 곽을 본다.
김도향의 명상음악 시리즈 중 너무 슬플 때 듣는 음악이다.

"참 편리하게 사네. 슬퍼지면 슬플 때 듣는 음악으로 치유하고...... 그런데 난 음악을 들으니까 더 슬퍼진다......"

나는 카세트 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넌 항상 헤어지자고만 했지. 원인은 늘 나에게 있었지만..."
그가 길 건너편의 빨간 신호등을 쳐다보며 내 뱉었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처음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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