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옹윤례.
[검경일보 객원 필자 기고/ 소설가 옹윤례] 처음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그때 우리는 벌거벗고 있었다.

나는 스무 살, 그는 스물 한 살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의 하숙방에 남아있었을까? 아마 그와 나는, 그리고 몇 명은 제이 선배가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모를 하다 퇴학을 당한 선배들의 복학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합류함으로써 학교는 다시금 술렁거렸다. 제이선배는 복학생 중의 하나였다.

서클은 두 파로 나뉘었다. 같이 학교를 다니다 운 좋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선배들은 졸업반이 되었고, 그때 더 이상 학생일수 없었던 몇 명의 선배들은 1학년이나 2학년부터 다시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서클에 나오게 되자 서클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복학한 선배들은 한 결 같이 검정고무신이나 흰 고무신을 상징처럼 신고 다니며 마치 자유인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만년대학생이라는 여유를 부리면서 마치 세상을 초월이라도 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사히 졸업반이 된 선배들을 경멸하고, 사상이나 이념에 관심이 없는 후배들은 무시하고 다녔다.

그러나 졸업반 선배들은 그들을 한심한 대학생, 무모하고 어리석은 친구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드러내놓고 데모를 하던 서클도 아니면서 해마다 커리큘럼 속에는 헤겔의 변증법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필수적으로 들어있던 명세기 철학 서클이었던 이 모임이 항상 방향설정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으나 복학생들로 인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신입생이었던 우리들은 철학이라는 말조차 사치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이념이나 사상에 목이 말라있었고, 선배들은 순수철학을 강요했다.

너희들 임마, 초창기의 선배들도 너희들처럼 목말라했지. 그런데 그들이 모두 지금 뭐하는 줄 아냐? 학교도 못 다니고 취직도 못하고 무능력자가 되어있어. 주위에서는 인정도 못 받고.... 먹고살아야 하는 애들은 어쩔 수없이 노 가다나 시장에서 새벽에 물건 나르는 일을 하고, 밑천이 좀 있는 애들은 그나마 학교 앞에 쫄면집이라도 차릴 수 있었지. 너희도 그렇게 되고 싶어? 정 그러고 싶으면 이 서클 탈퇴하고 아예 데모나 하는 서클로 가거라. 우리 서클은 순수한 철학 서클이야. 졸업반 선배들은 우려하는 목소리로 협박을 하고 다녔다.

우리들은 그들을 비겁한 선배라고 욕하면서도 서클을 탈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몇 명의 복학생 중에 제이선배가 있었다.

백팔십 센티가 넘는 훤칠한 키에 모자를 뒤집어 쓴 덥수룩한 머리, 커다란 검정 뿔테안경과 그 안에서 날카롭게 반짝거리는 작은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을 비웃는 듯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 어울리지 않게 깨끗해 보이는 하얀 티셔츠와 색 바랜 청바지, 그리고 검정고무신... 서클에 가입하자, 마자 선배들은 전설적인 선배가 있었다면서 제이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줄 곧 하곤 했다.

제이선배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영국 왕립학교에서 주최하는 세계 어린이 수학대회에서 우리나라 대표로 뽑혀 어린나이에 유학을 하고 왔으며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능통하고 5개 국어를 할 수 있으며, 학기 때마다 영어나 독어로 시낭송회 겸 연극 등을 한다고 했다. 거기다 그가 쓰는 말은 모두 세익스피어의 책에 나오는 대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선배가 학교를 다니던 당시 그를 따르던 친구나 후배들, 아끼던 선배들은 합숙훈련 하듯 같은 집에 하숙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건강도 좋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고 절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선배가 복학을 한 것이다. 제이선배는 목이 말라하는 우리들을 알아채기라도 하는 듯 우리들에게 사회과학도서를 읽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우리들은 금세 제이선배를 교주처럼 추앙하고 흉내 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의대생이라 여러 가지 재시험에 걸린 제이 선배가 시험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선배는 방학이 시작되면 대천바다 근처에서 민박집을 얻어 합숙훈련을 하자고 했다.

학교근방의 라면집이나 술집은 썰렁하게 비어있고, 매일 최루탄 가스가 날리던 교문도 어느새 초겨울 바람에 휴지만 날리고 있었다.

인문 관 뒤에 있는 기숙사 건물이 공사 중이었으며 그 샛길을 따라가면 추수가 끝난 썰렁한 논길이 나오고 드문드문 배추가 심어진 샛노란 배추밭이 나왔다. 배추밭 사이로 한참을 올라가면 고호의 그림에 나온 듯, 한 조그만 교회가 덩그맣게 서있고, 그 옆으로 탱자울타리를 한 그의 하숙집이 나왔다.

돌멩이를 들어 탱자울타리에 던지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노란 탱자 알이 와르르 땅바닥으로 떨어지곤 했다.

대문도 없는 텅 빈 하숙집. 그곳에서 그와 나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 제이선배가 빨리 시험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방은 연탄불이 꺼졌는지 몹시 추웠고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너무 추워서 죽을 것만 같아.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들판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줄 아냐? 서로가 옷을 다 벗고 껴안고 있으면 그 체온으로 인해 결코 얼어 죽지는 않아.

그 말에 우리는 누가 먼저인지 몸에서 옷을 하나씩 뜯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벌거숭이가 되었다. 난 새가슴이야.

그가 부끄러운 듯 나에게 등을 돌리며 돌아누웠다. 나는 문득 그에게서 새 한마리가 튀어나와 방안으로 날아가는 걸 느낀다.

새가슴이 뭔데? 여기에 새가 사는 거야. 그럼 넌 새였어?
내가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새가 사느냐고?
응, 새가슴이라면서?
봐, 볼록 튀어나왔잖아, 그래서 새가슴이야.
정말이네. 그럼 이 안에 새가 살고 있겠네.
그가 피식 웃는다.
넌 참 엉뚱하구나.

밖에서는 심한 바람이 불어댔다. 가끔씩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언 몸이 녹을 때까지 그렇게 꼭 껴안고 있었다.

어느새 얼어붙은 몸이 녹기 시작하면서 더워진다. 너무 더워서 숨이 막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강렬해진다. 그 눈빛을 받아내지 못한 나는 반대로 눕는다. 어느새 내 옆에는 그의 얼굴 대신 그의 발이 놓여 져 있고, 그의 얼굴 앞에는 나의 발이 놓여있다. 그가 나의 발바닥을 쓰다듬는다.

꼭 모래사장 위를 걷는 기분이야. 부드럽게 젖은 모래가 발바닥에 와 간지럽히는 기분......

그렇게 말을 하고 나자 나는 정말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누워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날리고, 얼굴에 뿌려지는 모래의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멀리, 아주 먼 곳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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