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옹윤례.

[검경일보 객원 필자 기고/ 소설가 옹윤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이상이 말한 69야.
그게 뭔데?
6자를 거꾸로 하면 9자가 되잖아. 지금 너와 내가 거꾸로 누워 있잖아.
내가 그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러다가 문득 멈춘다.
한번 만져봐.
싫어.
괜찮아. 어떻게 생겼냐?
꼭 핫도그 같다.
한번 먹어봐.
뭘?
핫도그...
으아아악...
그거 먹으면 여드름이 없어진대.
차라리 여드름 나고 말겠다.
넌 어때?
내가 묻는다.
꼭 홍합같아. 꽃잎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맛있겠다. 먹어볼까?
으아아악... 여드름 치료제 하나 사줄게.
까르르 웃는다. 밖에서는 몹시 바람이 불어대고 가끔씩 노란 탱자 알이 툭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한번 해볼까?
어떻게 하는 줄 알아?
그냥 하지...
하지말자...
왜?
허무해질 거 같아.
어떻게 알아?
소설책에서 읽었어. 하고 나면 허무해진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한번 해보자.
싫어...
왜...
지금도 허무한데 더 허무해지면 죽어버릴 것 같아.
......
갑자기 어색해진 기분을 어떻게 할 줄 몰라 내가 다른 얘기를 꺼낸다.
김교수님이 제이 형보고 우리학교에서 하나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했다면서?
응.
그런 사람이 왜 우리학교 왔지?
학력고사 때 답안지를 하나씩 내려썼다고 하던데. 그 선배가 다음에 병원 차리면 병원 이름을 물랑루즈라고 한다더라.
어울리겠다. 간호사들이 모두 춤을 추면서 근무를 하고 환자들은 의무적으로 술을 마셔야 진료를 받고... 그 병원문턱만 가도 병이 낫겠는데...
까르르 웃는다.
기말고사 땐가 도서관에서 너랑 같이 공부하다가 제이 형 만난 적 있지? 그때 제이 형한테 왜 나 예뻐? 라고 물어봤냐?
그냥. 내가 너랑 같이 있으면 제이 선배가 뭐라고 할까 궁금해서...그때 제이 형이 영어로 뭐라고 썼어?
너 가 진흙 속에 묻힌 진주래. 그런데 너무 깊이 묻혀 있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야.
역시 천재는 천재가 알아본다니까.
......
그러나 제이 선배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도 그와 나는 계속 그의 하숙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우리는 그때 첫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같다. 여름에 물들인 손톱의 봉숭아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나? 어쩐다나? 하는 말을 믿고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노란 탱자알들이 굴러다니며 싸한 향기를 풍겼다. 마당 한가운데는 우물을 메우고 대신 펌프가 놓여 있었다. 펌프의 손잡이를 잡고 물을 뿜어내면 적당히 따뜻한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기역자로 된 일곱 개의 방중에 그의 방은 길 바깥쪽으로 난 첫 번째 방이었다. 문을 열면 부엌 겸 연탄 광으로 쓸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나오고 방문을 열면 손수건만한 창으로 햇볕이 와르르 쏟아지곤 했다. 그 창문을 열면 푸릇푸릇한 무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교회의 낡은 종이 보였다.

하루 종일 방안에 쳐 박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배가 고프면 그와 나는 몰래 무 밭에서 싱싱한 무를 뽑아 먹거나 알밤들을 연탄불에 구워먹곤 했다. 톡 톡톡. 주홍빛 연탄불에 올려 진 알밤들이 속살이 터지면서 비명을 지를 때마다 알밤은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팔짝팔짝 뛰며 아궁이 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군밤을 구울 때는 칼로 한번 흠집을 내줘야 하는 거야. 잘못해서 눈알로 튀면 눈알이 빠질 수가 있어. 설마. 정말이야.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애가 애꾸눈이었는데 밤 구워먹다가 뜨거운 군밤이 눈알로 들어가서 그렇게 되었대. 그와 나는 손과 입이 새까매지도록 군밤을 까먹으며 그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밤이면 탱자가 마당에 툭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첫눈은 언제 올까?
곧 올 거야.
잠 안 잘래?
잠이 안 오는 걸
그래도 눈 감고 있으면 잠이 올 거야.
자려고 눈을 감으면 무서워져. 어떤 형체도 알 수없는 것이 덮치기도 하고 높은 낭떠러지에서 자꾸만 헛발을 디뎌 어둡고 캄캄한 어딘가로 떨어지는 것 같아. 깊은 우물 속 같기도 하고 블랙홀 같기도 하고... 너무 무서워.
그는 조심스레 나의 얼굴에 제멋대로 흩어져있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속삭인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꿈꾸는 안약 같은 게 있으면 좋겠어. 어린 시절이나 과거의 즐거웠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꾸고 싶으면 파란 안약을 넣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핑크빛 안약을,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으면 노랑 빛 안약을, 그립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죽어버린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보라 빛 안약을 - ,

그리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자고 싶으면 유리알처럼 투명한 액체를,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갈아 끼우듯 내가 꾸고 싶은 꿈을 골라 밤새 꿀 수 있는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 가 한번 발명해봐. 돈 엄청 벌 거야.
십년 후쯤 우리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난 지리산 깊은 산자락에서 벌을 치면서 살 거야. 가끔 카메라로 새도 찍 고, 이름 모를 들풀도 찍고. 넌 어떻게 살고 있을 거 같아?
난 소설가가 되어있을 거야.
그래, 넌 늘 소설 같은 이야기만 하니까. 그때 가끔씩 날 찾아와줄래?
아니, 우리 그때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도 서로 안 체 하지 말자.
슬프다.
우리 내년 여름에 지리산에 갈까? 연극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여자 친구랑, 너랑 나랑 넷이서!
내가 갑자기 이불을 걷고 방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줍는다.
옷 입어. 나 화장실 가야돼.
그도 주섬주섬 옷을 걸친다. 방문을 열고, 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겨울바람이 매섭다.
여기서 쏴.
그가 우물가를 가리킨다.
싫어.
아무도 안보잖아.
보고 있는 게 너무 많은걸. 별, 하늘, 나무, 그리고 어둠......
밤하늘을 바라본다. 놀랍게도 은하수가 떠있다. 은하수는 마치 은수저처럼 반짝인다.
누굴 위해서 길을 만들어 놓았을까? 별들이 결혼하나?
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퍼진다.
너무 아름다운 밤이야.

그의 방 끄트머리에 화장실이 있다. 기둥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 붉은 알전등이 환해진다. 야옹,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가 가늘게 울어댄다.

춥겠다. 불쌍하다,
그가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똑똑, 그가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피식 웃는다.
아무도 없는데 왜 노크를 하냐?
안에 귀신이 있으면 빨리 나가라고...

고양이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고양이와 놀아도 날은 새지 않는다. 지친 고양이마저 구석지에 웅크리고 잠이 든다.

나는 그의 앨범을 펼쳐든다.
우리 사람 찾기 하자. 이렇게 아무데나 펼치고 사람이 많이 나온 사람이 이기는 것. 그가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한다.
이 키 작은 남자는 누구야?
나는 앨범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형이야.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작년에 귀국했는데 아직도 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어. 아버지는 정년퇴직하셨는데 형 때문에 다시 빵공장에 취직하셨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빵에 앙꼬를 넣는 일이래. 힘드시나봐. 그런데 형이 아직 취직을 못해서 그만두지도 못하고,
나는 얼른 앨범을 넘긴다. 그와 나란히 웃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이 여자는 누구야?
작은 누나.
예쁘다. 시집갔어?
아니......죽었어......
왜?
사귀던 남자에게 버림받았나봐. 수면제를 서른 알 쯤 삼켰대.
바보같이......난 죽어도 자살 같은 건 안 할 거야.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방안에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꼬박 밤을 새운 뒤 새벽녘에야 어렴풋이 환상 교향곡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를 세다 잠이 든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까? 우리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종소리에 다시 잠이 깨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탱자울타리로 된 그의 하숙집에서 처음엔 제이선배를 기다리다가, 다음엔 첫눈을 기다리다가 끝내 첫눈을 보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끼이익.
갑자기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앞차의 꽁무니에 닿을 듯 말 듯 하며 멈췄다. 뒤따라오던 차들도 급정거를 했다. 마주 오고 있던 차들도 요란하게 멈춘다. 사고가 났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기웃거린다.

푸들강아지 한마리가 길 한복판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딸랑딸랑, 강아지의 목에 매달린 방울이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성질 급한 택시기사들은 차 창문을 열고 요놈의 개새끼, 하면서 침을 뱉어 냈다.

시내버스 승객들은 창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재미있는 듯 낄낄거리기도 하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행이도 푸들강아지는 다가오고 있는 차들 사이로 요리저리 빠져나가 어느새 가로수 기둥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오줌을 싸고 있다. 하하하,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차안에 울려 퍼진다.

"그렇게 재미있어?"
그가 재빨리 웃음을 거둔다.

길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 같다. 어느 쪽으로 가도 길은 보이지 않고, 안개만 자욱하다.

테이프는 어느새 한쪽 면을 다 돌고 귀에 거슬리는 신경 음을 내고 있다. 그가 스톱단추를 누르고 테이프를 뒤집은 뒤 플레이를 누르려한다. 나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무심히 바라본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다. 주변풍경이 보이지 않고 온통 짙푸른 색이다. 멀리 들판이 보인다. 그리고 낮게 움츠러든 겨울 산이 잔설을 이고 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마을이 보이고 굴뚝에서 뭉실뭉실 연기가 피어오른다.

논가에 앉아있던 겨울새들이 떼를 지어 일제히 날아오른다. 나는 새떼를 놓치지 않으려고 창밖으로 얼굴을 바짝 댄다. 멀리 검은 점들이 가늘게 떨린다.

"겨울 철새야. 여기만 와도 좀 살겠지?"
그도 새를 바라보고 있었던가.
"어떤 새를 좋아하지?"
"뻐꾸기..."
"얌체 같은 뻐꾸기가 좋다 구? 뻐꾸기는 자기 둥지를 만들지 않아. 남의 둥지를 빼앗는 약탈자지."
"그래도 좋은 걸. 뻐꾸기 소리가 좋아서 뻐꾸기시계를 샀는데 방안이 어두우면 울지 않아. 너무 불쌍해서 밤에도 불을 켜고 자. 자면서 어렴풋이 뻐꾸기소리를 듣고 있으면 꼭 내가 깊은 산속에서 잠들어 있는 거 같아."
"뻐꾸기가 불쌍하다. 잠도 못자고 밤새 주인을 위해서 울어야 되니까."
"아니야. 뻐꾸기도 주인을 위해서 밤새우는 게 행복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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