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검경일보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고은의 詩처럼 오늘도 이른 새벽 배낭을 메고 사진기를 챙겨 부지런히 양평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꽃샘추위를 가르며 가볍게 내딛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열차를 보는 순간, 벌써 설렘은 안동행 열차 안에 몸을 싣고 있었다.

요즘 트렌드는 ‘느림의 미학, 느리게 살자’여서
실천 하자는 의미도 있고, 워낙 급한 성격도 다스릴 겸 해서 나는 자주열차 여행을 다닌다.
열차 이용의 편리함은 우선,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이뿐이랴, 창문 밖의 풍경은 달리는 내내, 각 마을의 구구절절한 삶의 모습으로 내 안에 들어와 연륜으로 느끼게 해준다.

예전엔 빠른 걸음으로 유적지 하나를 더 보는 게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철들며 바뀐 생각은 ‘여행은 과정이며, 사람이다.’ 로 정의 내려진다.

울긋불긋 가을 단풍색깔의 할머니들이 단양역에서 우르르 객차 안으로 들어오신다. 아마도 자식 잘 되게 해 달라고 밤새 기도하고 올라오는 것이리라.
그런데 할머니들은 색깔이나 디자인이 똑같은 털신을 신었다. 신발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기도처로 유명한 “구인사“에서 ‘신발을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한 방편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참 지혜롭고 이채로운 풍경이다.

열차는 엉금엉금 풍기, 영주를 거쳐 안동역에 도착했다.
안동은 어딜 가도 ‘정신문화의 수도’ 라는 푯말이 택시나 버스, 하물며 공공장소에는 어느 곳이건 붙어 있었다.
이는, 헤비급 도산서원, 병산서원, 묵계서원이 있고, 역동서원, 사빈서원, 호계서원, 화천서원, 타양서원, 고산서원 등이 산재해 있는 자부심일 터이다.

안동버스정류장의 시간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게 짜여있었다.
40여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묵계서원과 묵계종택.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를 봉향하는 곳으로 조선숙종13년(1687)에 처음 건립 되었다.
보백당은 성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응계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냈는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강당, 읍청루, 진덕문, 동재, 사당이 복원 되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보백당 김계행은 (1431~1517)문신으로 청백리에 뽑혔던 분이다. 안동소산에서 태어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 하였다.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한 선생은 대사성, 대사간, 홍문관, 대제학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고향의 모습은 잘 정돈된 서원만 있지 공부하는 학생이 없으니 썰렁하기 그지없다.
유교정신의 명맥을 이어받아 공자 왈, 맹자 왈 책 읽는 우렁찬 소리가 방방곡곡 울리길 기대 해 본다.

서원자락을 내려와 조그만 개천 다리를 건너니 만휴정 700m라고 적혀있다.
그 길을 급하게 걷고 있는데 경로당 어르신들이 불러 세운다.
대보름 잔칫날이니 윷놀이도 하고 점심이나 먹고 가란다.
아직은 시골인심이 넉넉함을 감사하게 느끼며 훈훈한 마음으로 누구도 가지 않은 눈길을 사브락 사브락 걸어 산으로 쭉 올라가보았다.
와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 겨울의 설경도 아름다운데, 한 여름에 주는 시원함은 또 어떠할까?
이 깊은 계곡으로 콸콸 흘러 내려가는 물줄기는 분명, 오장육보를 시원케 뚫으리라.

만휴정 원림은 보백당이 1501년 길안 묵계로 낙향하여 만년을 머물며 독서와 사색을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다.
계곡에 너른 바위와 그 위를 흐르는 물, 기암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송암 폭포의 위용, 그리고 솔 향 그윽한 아름드리 소나무에서 느낄 수 있는 그윽함. 그 속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정자는 자연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 선조들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자연과 일치되고자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 줄 “고마운 정신이요, 유산이다”
“吾家無寶物 . 寶物惟淸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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