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발톱 깍 기가 어려워졌다.
눈이 나쁜 탓이다.
손톱이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댈 수 있으니 별 불편함을 몰랐지만, 눈에서 먼 발은 몸의 유연성까지 떨어지면서부터 문제가 됐던 것 같다.

생각 해 보면 발톱은 누가 따로 잘라 주지 않는 한 내 스스로 잘났을 터인데 사실 잘랐다라고 말하기엔 다소 민망한 게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어림짐작으로 더듬더듬 조심조심 그렇게 용쓰듯 치러내던 일종의 행사였다.

지난 밤, 잠자리에 들려다 말고 불편함을 느껴 살펴보니 발톱 일 부분이 부러지고 많이 웃자라 있었다.
그냥 두었다가는 살 속을 파고들 수도 있겠다 싶어 말려 들어간 발톱을 마구잡이로 일으켜 세워 잘라냈다.
안경이라고 찾아 껴 봐야 어차피 잘 보이지 않을 터, 따로 전등 더 켤 필요도 없이 어둠 속 발톱 깍 기를 시도 하는데 두어 개 자르다 말고 결국엔 중도포기, 발가락 한 녀석이 아려 오는 게 아무래도 너무 바짝 잘랐었나 보다.

밤새 아려오는 통증 때문에 뒤치락거리며 잠을 설쳤더니 눈이 더 침침하고 몸 또한 찌 부둥하다.
깍 다 만 나머지 발톱처리도 할 겸, 아침 일찍 숙소주변의 네일아트 숍을 찾는데, 히쭉 웃음이 나온다.
내 인생이, 네일 아트 숍이라니, 그것도 베트남까지 와서 말이다.
안 그래도 처음인데다 온통 여자들뿐이라 이것저것 더욱 어색하고 쑥스럽다.
다행히 찬 공기를 쐬었더니 머리는 상쾌하다.
큰 거리엔 벌써 일터로 향하는 자전거 행렬이 보이고 주민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분주하다.
이른 아침의 찬 공기가 무색한 듯 조용히 햇살에 밀려 흩어진다.
발톱 때문에 맞은 오늘의 첫 경험처럼 나이 들면서 생각지도 않은 처음 겪는 일들이 하나씩 는다.
분명 달갑지 않은 부분이 크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는 매순간순간이 처음 투 성이었을 유아기의 개별 적 주체였지 않는가.

유년, 노년 모두 에게 비슷하게 주어지는 ‘처음’이라는 ‘상황’은 의지나 의식의 정도차이 그리고 성장과 퇴화라는 대립적 측면은 있겠지만 양쪽 모두에게 익숙지 않는 ‘처음’이었을 거라는 점만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 어색한 ‘처음’이 인생의 시작과 끝에 그렇게 극적으로 반복되는 현실이 꼭 ‘도돌이표가 있는 악보’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 한번만 부를 수 있는 노래,
도돌이표가 시작되고 얼추 노래의 끝을 짐작해야 하는 노래 말이다.

저작권자 © 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