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검경일보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조선후기 학자이며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옛날 할머니들도 손자 돌잔치 때에 상 앞에 무명실과 붓을 놓고서 ‘명은 길어 실 같고, 붓을 잡으면 추사를 닮아’ 하고 빌만큼 추사는 잘 알려져 있다.

예의의 고장 예산군 신암면에 위치한 추사의 고택은 지방 문화재 52호로 지정되어 있고 추사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달인 화순옹주의 무덤과 무덤 앞 정려문이 지방문화재 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고택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가 집의 표본답게 위엄 있고 절제된 옛 한옥의 아름다움을 음미해 볼 만하다. 인상적인 점은 주련에 쓰인 추사 글씨다. 내용도 좋은 문장인데다 설명도 잘 되어 있고 버터를 바른 듯 풍부한 글씨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주변엔 그의 아버지기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백송 한 그루가 이채롭게 서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생의 일생을 말 하면서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되며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기록되었다.

아픔만큼 성숙 해 진다고, 가문의 배경과 본인의 출중한 실력으로 규장각 대교,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840년 55세에 정변에 휘말려 제주도 대정현에 8년 3개월 유배되어 긴 고통의 시산을 보내지만,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 추사체라는 독보적인 글씨로 결실을 맺는다.

제주도로 유배 가기 전 친구였던 초의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에 들러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떼라고 큰 소리 치지만 9년 후에 다시 들른 대흥사에서 다시금 원교의 글씨를 “대웅보전” 올리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일화도 있다. 추사의 일생은 대 명문가의 후손답게 부귀한 삶도 누렸고 고독한 유배생활까지 영욕이 교차된 삶이었다.

곡절 많은 인생을 살았기에 추사체와 세한도에서 ‘문자향 서권기’의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완성된 추사체를 보면 천재성을 생각 하지만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70평생에 벼루10개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없애면서 노력한 산물이다.”라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진정 추사는 조선을 뛰어 넘은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 석학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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