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진환 교수.

시를 많이 읽어라.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할 수 있는 독해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시를 많이 읽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구하는 시집 읽기는 단순한 독서로서가 아니라 올바른 시에 접근하는 좋은 시와의 만남을 위한 독서이다.
그 때문에 단순히 읽고 끝나는 항용의 독서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시와 만나기 위한 시집 읽기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다.

첫째. 시집을 정독하라.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 심심풀이를 위한 것 등 여러 가지 목적을 갖는다. 시집을 읽는 것도 멋으로 심심 하니까, 우연히 손에 잡혔으니까, 하는 식의 진정 독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건성으로 읽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는 의미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속에 함축된 암시나 상징 그리고 늬미의 변용이나 치환을 통한 정서적이고도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전달하는 일종의 변용, 치환, 전이의 미학이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것은 시인의 미적이고 감동적인 체험을 빌어 시인이 체험했던 감동을 간접 체험을 통해 획득하는 행위이다.

시는 내포적(內包的) 언어미학에 의존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사물의 해석이나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 설명하는 과학적 진술과는 달리 사실이나 진실을 안으로 감추어 암시나 상징으로 드러내는 의사진실이다.
그 때문에 시는 의미로 해석 되는 것을 거부하고 논리로서 증명되는 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시가 메타언어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메타언어는 어떤 사물을 지시하고자 했을 때 밖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감추어진 뜻, 즉 숨은 비의(非意)를 빌어 나타내는 언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약속된 의미망을 벗어나 초월적 의미를 동원하거나 차용한다. 그래서 시는 좀처럼 감춘 뜻을 드러내지 않고 함축된 암시나 상징으로 드러낸다.

산문이 사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명중하기위해 설명하고 또 설명해서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시는 논리를 버리거나 초월한다.
그 때문에 시를 읽고 밖으로 드러난 의미에만 접근하려 한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한다.
여기서 정독이 요구된다. 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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