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산 이정원 시인.

2015년 2월 26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62년 만에 간통죄를 폐지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간통죄가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입니다. 이 판시로 ‘성은 신성한 것’이며 ‘사랑과 성은 분리될 수 없다’는 내면적 가치를 수면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유림에서는 ‘ 전통적 윤리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지만 변화하는 세계조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60-70년대, 우리나라 은막계를 휩쓸었던 남녀톱스타 최무룡씨와 김지미씨가 간통죄로 구속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킨데 이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혼한 전례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연예계에는 수많은 스캔들과 함께 여배우와 저명인사간에 이혼과 결혼이라는 풍조가 만연되었으며, 대표적인 예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 정윤회, 드라마 ‘허준’의 황수정, 프로야구선수인 임창용, 탈렌트 옥소리, 가수 태진아 등이 간통이라는 죄명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모두가 멸시와 동정을 함께 받았지만 근본원인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간통죄가 유지되었다면 더 많은 스캔들이 발생했을 겁니다.

사랑은 부모자식간의 그윽한 사랑, 연인끼리의 달콤한 사랑으로 대별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사랑’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연인간의 사랑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에는 국경이 없었으며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친 예가 허다합니다. 남녀관계는 사랑의 역사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일상사나 소설에서 사랑을 빼고는 주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입니다.

사랑은 소위 오감(五感), 미각·청각·후각·시각·촉각의 총화적 개념입니다. 이들 각 수용기는 특수한 자극인 적합자극만을 받아들여 흥분을 일으킵니다. 인간에서 외부 자극의 인지는 이 오감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랑은 달면서 쓰고, 아름다우면서 추하고, 좋으면서 싫고, 만나면 다투기도 하며, 형체가 없어 직접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느낌으로만 맛보고 상상 속에서만 그려집니다. 사랑은 때로는 보약이 되고 때로는 독약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묘약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애증이라고도 부릅니다.

미국의 유명한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는 워싱턴 주립대학을 졸업한 세 명의 젊은이가 창업한 벤처기업입니다. 씨애틀은 커피의 고향이라고 할 만큼 커피가 유명하지만 커피산업은 사양산업이었습니다. 이 때 이들 젊은이들이 착안한 점이 커피를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즐기고, 쉬고, 대화하는 아지트로 만들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맛, 음악, 냄새, 분위기, 느낌을 개발하는데 운을 걸었고 이 전략은 성공했습니다. 사랑과 낭만은 분위기를 마시는 휴식처에서 더 잘 발효된다는 오감마케팅이 적중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게 어떤 과학적인 공식이 있어서 남녀 간을 미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저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헤어지면 생각나고, 생각나면 만나게 하는 고리, 즉 오감을 만족시키는 생물학적 반응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 반응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가 달콤한 속삭임, 향긋한 키스, 절정의 섹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가페적이면서도 에로스적입니다.

사랑에는 계급장이 없습니다. 연령, 직위, 국적, 빈부, 학력, 피부와 관련된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유분방합니다. 그런 인과관계로 사랑을 빙자한 마의 촉수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빙의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정러시아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혈우병을 호전시킨 가짜 수도승 라스푸틴은 궁정에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리의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 황제의 집안과 국정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황후와 귀족의 부인들까지 대물을 앞세운 에로스적인 사랑의 힘을 빌어 육체적인 접촉으로 정화(淨化)의 치료라는 마법을 써가며 군사력까지 장악하였으며 얼음구덩이에 처박혀 죽을 때까지 국정을 농단한 결과 제정러시아는 알렉산드리아 황후의 전제정치에 맞선 민중혁명으로 결국 망하고 맙니다. 부끄럽게도 고려 때의 신돈이라는 요승도 그런 기법에 충실한 선각자(?)였습니다. 최근에는 최순실이라는 깜도 안되는 여인이 대통령을 팔아 국정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정치가는 배꼽아래 부분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걸지 말라는 어느 지도자도 있었지만 아랫도리의 마술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은 예는 동서고금에 허다합니다.

이번 박근혜대통령 탄핵으로 비화한 최순실 게이트도 사소한 사랑싸움에서 발단이 됐다는 의혹이 짙습니다. 이 게이트의 시작은 최순실씨가 만든 대통령의 옷 제작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충실한 동업자였던 고영태가 몰래 촬영하여 종편방송사인 TV조선에 넘겨준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최순실씨가 썼다는 태블릿PC에 대통령의 연설문 등 국정에 관한 주요사실들이 입력됐다는 JTBC의 변질보도로 확대되면서 대통령탄핵사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영화 '내부고발자'라는 진실판을 현실에서 목격하게 된것입니다.

고영태는 최순실과 협력하여 가방과 옷을 제작 판매하다가 사업규모를 키워보려는 욕심에서 사업자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데 앙심을 품고 공작을 시작합니다. 소문으로는 최순실과 고영태는 내연관계이며 최순실이 차은택과 가까워지자 고영태가 홧김에 박대통령과 최순실 관계를 폭로합니다. 그러고 보면 최순실-고영태-차은택의 삼각관계가 탄핵의 불씨가 된 셈입니다. 장자크 루소는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돈이 사랑을 망칠 것이다"라고 했는데 최순실과 고영태의 관계가 바로 그 경우인 듯 싶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최순실이 고영태집을 방문했다가 밥상을 마주한 한 여인을 보게 되고 어느 날은 고영태 침실에 이 여인이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후 대판 싸움까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삼류소설 같은 질투의 사랑싸움이 대통령과 최순실 관계의 판도라상자를 열게 했다는 것입니다. 웃고 넘기기에는 그 확장성이 너무 어마어마합니다. 사랑이 변질되면 얼마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준 실화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꾸며온 음모라는 설도 탄력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뱉을 때는 씁니다. 커피향 같던 사랑이 하수구 같은 오물로 변질되면 지독한 냄새를 뿜게 됩니다. 사랑이 갖는 이중성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만나면 부부가 되지만 사랑이 증오를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원수로 변합니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을 보면서 사랑은 달콤한 맛을 주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달콤 쌉쌀하며 사랑이 품고 있던 환상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간통죄 폐지가 한량들에게는 박카스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을 품은 여인에게는 쥐약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이 아이러니가 모든 선남선녀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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