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오전 9시 전후로 아파트 정문엔 서너 살부터 대여섯 살 어린이를 태우기 위한 차량으로 북새통이다. 아니 아직 단잠에 빠져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이도 종종 눈에 띈다. 맞벌이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이렇게 잠을 떼어내지 못한 채로 어린이 집, 또는 유아원으로 이동해서 하루를 보낸다. 또한 아이들을 위탁시설에 양도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의 부모가 아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가족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어쩌다 집 근 처 공원을 지나칠 때 유모차를 밀고 공원을 도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보는 건 익숙하다. 군데군데 유모차를 한 쪽에 모아두고 그들만의 수다 삼매경에 빠진 모습도 아울러 볼 수 있다. 일터로 나간 자식들을 대신해서 손주들을 돌보는 사람들. 유모차 동창생들이란 별칭은 유모차에 실린 아이들이 아니라 아마 같은 상황에 놓인 노인들을 지칭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적게는 서넛부터 많게는 열 명 이상의 자식을 낳아 길렀다. 특히 어머니들은 요즘처럼 그저 오종종한 작은 살림이 아닌, 대가족의 숙식 수발을 다 들고 심지어 논일, 밭일까지 하면서 아이들을 혼자 돌보고 키웠다. 진정한 슈퍼우먼이 우리의 어머니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들 부모님치고 팔다리, 허리 성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를 혹사시킨 끝에 남은 건 이 곳 저곳 쑤시고 저리고 망가진 육신의 골병이다. 몸이 완전히 반으로 접혀진 채 버려진 유모차를 밀고 가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지난한 일생을 헤집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부모님이 이제 편히 누워 볼 새도 없이 육아의 현장에 있다. 바로 맞벌이 하는 자식들의 자식을 다시 돌봐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에 경제적인 것은 절대적이고 거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바로 육아다. 현대의 핵가족화 된 형태의 젊은 부모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봉착한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동동거리며 애태우는 자식들이 안타깝고 이리저리 공처럼 튕겨 다니는 손주들이 애처러워 다시 맡아 주는 부모의 마음이다. 그나마 온전한 가정이라도 있는 자식들은 몸은 고단해도 흐믓하기라도 하지만 간혹 이혼한 자식이나 미혼의 상태에서 낳은 손주를 안겨놓고 떠나버리면 더 암담하고 괴로운 현실이 된다. 당신들의 지난하고 끝없는 황혼육아의 고행은 누구의 책임일까.

맞벌이 부부의 육아문제가 사회적, 국가적 문제로 확대된 지는 오래다. 관계부처에서는 이런 저런 대책을 강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미비한 실정이라고 한다. 또 각 가정은 가정대로 자구책을 고심하지만 여러 여건이 흡족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나날이 인구는 감소세에 있으며 국가적으로 심각한 지경이 이르렀다. 그 이유가 젊은이들의 결혼 포기도 한 몫이지만 이런 육아문제가 더 큰 이유인지 모르겠다. 다 늙고 병든 부모에게 의탁하는 것이 최선책이 되는 현실. 이런 현실은 늙은 부모에게나 엄마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에게나 불행한 일임엔 틀림없다.

황혼육아는 골병이라고 한다. 허리 팔 다리는 물론, 심리적인 우울증까지 수반한다고 한다. 우리 친정어머니는 8순이시다. 아직도 목소리는 소녀처럼 카랑하고 일주일에 한 번 요가도 하고 노래교실도 다니신다.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시는데, 그것이 당신의 건강비결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다. 자식 일곱 중 누구도 어머니에게 육아의 짐을 지어 주지 않았으니 그나마 효자노릇 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정에 어르신들이 모여 앉으면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늙어 손주 키우지 않으면 그것도 큰 복이라고. 그나마 자식들이 그 자식을 맡기지 않으니 노인정에서 고스톱 치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모여서 함께 드실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그 변화 속에 발맞추느라 심신이 고단하다. 그래서 살아가는 순리나 일의 도모 순서에 위반하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어쩌면 획일적인 세태에 밀려 제 역할에서 자꾸 벗어나며 순리를 거스르는 속에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어 황혼을 맞이한 부모들에게 자식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짐을 얹어주고 부모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힘겨움을 방관하지 못하고 또 그 자식의 삶에 끼어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서 또 다른 관계가 유리되고 고달픈 생이 이어진다는 것은 부모님의 슬픈 황혼만이 아닌, 우리들의 씁쓸한 노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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