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 선택한 노동은 결국 그 삶을 망가뜨리고 앗아간다

이주옥(수필가)

‘두렵다. 이 아픈 몸 이끌고 출근하라네. 사람 취급 안하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집배원의 유서내용이다. 살인노동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내용이다.

집배원. 아니 우편배달부 아저씨.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친근하고 반가운 이름이다. 우체국하면 늘 그리움과 반가움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다소의 희생과 따뜻한 정이 흐르는 소통의 가교로 이어진다. 아날로그 시대의 가장 막강한 연결고리였던 편지와 우체통에 대한 향수와 의미는 지금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밤새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 때의 떨림, 답장을 기다리는 설렘, 가슴을 때리는 전보 한통이 주는 반전, 까막눈 어머니에게 읽어주던 자식들 소식에 얹힌 그 따뜻한 정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모를 전설 같은 이야기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이젠 편지를 쓰는 사람도 없고 급하게 전보를 받을 일은 더더구나 없다. 어머니의 문맹도 수시로 수화기를 통해 들려주는 목소리로 인해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됐다. 그런 시대의 변화가 이젠 저만치서 비가悲歌로 흐르고 있다. 살인노동이라는 이름을 매달고.

요즘은 앉아서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다. 발품 팔아 원하는 것을 얻고 관계를 맺는 것은 조금 모자란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문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며 사는 미련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한다. 그 중 직접 나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가장 무모하고 미련 한 짓이라 할 만큼 택배는 우리들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다. 우체국에도 편지를 부치고 급전을 보내던 풍경보다는 언제나 물건을 보내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집배원들도 이젠 소식을 전하는 낭만보다는 어깨 바스러지게 물건을 들고 배달하는 택배원 역할이 더 크다.

노동은 생계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고된 하루하루지만 노동의 신성함이나 생계유지에 가치를 두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도 인권 앞에 노동은 우위일 수 없다. 사람 앞에 노동 없고 사람 위에 노동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교통사고로 누워 있는 환자에게 인원 부족이라는 이유로 수시로 출근을 강요했고 급기야 한 가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집배원 사망사고는 지난 5년간 76건 일어났고, 올해에만 자살·교통사고·심혈관 질환 등으로 13명이 사망했다. 집배원들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6시간, 연평균 노동시간은 2,800시간이다. 2015년 경제활동인구조사 기준으로 일반 노동자보다 1주에 12시간(연간 621시간)이 더 길다. 그야말로 격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 중에 조급함을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빨리빨리를 부르짖으며 참거나 기다리지 못한다. 아마 이번 안타까운 사고도 그 부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 소식이나 물건배달도 독촉을 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당국이나 사업장에서는 현장 종사원들에게 독촉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능력 이상의 능력을 요구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이어진 것이다. 그들이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첫 번째 이유다. 예산을 이유로 증원에 인색하고 적은 숫자로 넘치는 노동을 감당해야 하니 어찌 사람의 힘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현대 사회의 불행은 불특정 다수의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다. 이 때 노동자가 권리를 찾고 인권을 부르짖는 것은 배부른 소리다. 노사 간이 갑과 을로 분류될 때 그 불행은 정점에 다다른다. 서로의 입장과 서로의 고충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으면 동반 몰락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고가 터지면 사후 약방문처럼 그때서야 문제점을 들여다보고 해결책을 찾는 병폐는 아무리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살고자 선택한 노동은 결국 그 삶을 망가뜨리고 앗아간다. 달성해야 하는 목표 앞에 인권은 언제나 하찮은 것이 되는 것이 산업사회라면 오랜 날 문명을 이루기 위해 애쓴 것은 다 무위한 일이고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작권자 © 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