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우리가 가지는 감정을 가장 크게 둘로 나누기로 했을 때 가장 선명한 것은 아마 ‘좋다.’ ‘나쁘다.’일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이 그 두 가지뿐이라면 오히려 속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그 좋고 나쁨에서 파생되는 세부적인 감정의 찌꺼기들로 인해 골치가 아프고 관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물리적으로 사물에 부딪치거나 넘어져서 피부가 까지고 피가 나는 것은 오히려 간단한 상처다. 사람으로 인해 감정을 다친 것이 오히려 상처도 깊고 치유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나 가족이나 연인에게 받는 상처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아프다.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가해지는 친밀한 폭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사는 중에 크게 상처를 받았던 것은 언제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였던 것 같다. 아마 나 또한 가족이나 친구에게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분명 폭력을 가했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친밀함을 매개로 주고받으며 딱히 빚이라는 부담 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서로의 일상에 무차별 관심을 갖고 심지어는 감정에까지도 관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사랑은 상처를 허락한다고 했던가.

나는 대체적으로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받는 편이었다. 내 무례함과 인색함이 뻔히 보이는 데도 언제나 가족들과 친구, 지인들은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내 허락을 구하지 않고 수시로 나의 사생활에 깊이 들어왔고 내 생활 반경을 무자비하게 휘저었다. 나는 주로 받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그들의 관여를 또 다른 사랑의 연결쯤으로 여기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다지 불편하거나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에 찍힌 몇 개의 멍을 발견했다. 선명한 것도 있었고 확인 불가할 정도로 희미한 것도 있었다. 아니 정작 나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이 먼저 그 멍을 발견했던 것 같다. 자주 웃지 않았고 늘 무기력함으로써 집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 상처를 가족들에게 고스라니 돌렸던 모양이다.

먼저 가족들이 처방을 내려줬다. 우선은 조금씩 그들에게 멀어지고 조금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권했다. 쉽게 말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받은 사랑에 빚을 느낀 나는 망설였고 두려웠다. 하루아침에 단절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덥석 받지도 못하며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조심스럽게 보호망을 둘러치는 것으로 상처가 예견되는 또 다른 도전을 감행했다. 그 후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이 무심결에 던지는 날카로운 말이나 내 생활에 파고드는 무례한 행위에 맞서기 시작했다. 물론 무리수였기에 망설임 없는 무차별 공격이 돌아왔다. 그 사이 나는 간간히 먹은 것을 토해내기도 했고 마음에는 수없는 실금이 그어졌다. 하지만 점차 내성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상처가 되는 말에도 덤덤해지기 시작했고 날카로움을 피해가는 지혜도 생겼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첫 번째 홀로서기였을 것이다.

그 후 누군가는 말했다. 내게는 다른 사람이 도저히 끼어들거나 넘어설 수 없는 선과 벽이 보인다고. 한 없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찰나에 늘 내게는 ‘여기까지’라는 몸짓이 보인다고 했다. 물론 의도하고 작정한 나만의 처세였고 관계망이었다. 사랑을 무조건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도적인 내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를 먼저 보호하고 다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섭섭함을 토로했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관계를 위한 환기임을 알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조금씩 강도를 더했다.

격의 없다는 것은 관계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곧 내 편이 될 수 있는 우선권을 가지며 슬픔이나 아픔이 있을 때 가장 위로가 되고 기댈 언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는 데 대단한 위안이고 버팀목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워도 최소한의 거리는 꼭 필요했다. 또한 그 틈에 상대방을 위한 배려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적당한 관계의 거리.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그것이야말로 건강하고 멋진 관계를 이어나가는 필수요소다. 무엇으로라도 관계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적당한 거리야말로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친밀한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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