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少年易老하고學難成하니,(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려우나니) 一寸光陰인들 不可輕이라.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길 수 없느니라.) 未覺池塘春草夢인데 (연못가의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하였는데,) 階前梧葉已秋聲이라. (섬돌 앞의 오동나무 잎은 이미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주자의 권학시다.

50여명 되는 반 아이들은 연세 지긋한 한문선생님이 출석부를 끼고 교실로 들어서면 녹음기의 재생버튼을 누른 것처럼 자동으로 권학시를 읊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쉬는 시간의 장난을 매달고 뒤늦게 자리로 달려오는 아이의 입에서도, 그때서야 가방에서 한문책을 꺼내는 아이도 마치 호흡처럼 뱉어냈다. 중학교 3년 내내 한문시간이면 했던 일이었다. 그 권학시는 입에 붙어서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자동으로 나온다.

학창시절 그저 강요에 의해 습성으로 외던 권학시는 어느 누구에게는 학구열을 일으켰을 것이고 누구는 그 의미조차 새겨본 적이 없는 그저 읊조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삼 스승님의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있으니 그 의미와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은 삶의 과정 중에서 가장 오묘하다는 사랑에 도전하는 날, 거친 늑대가 되어 여우같은 여자 하나 잡으러 간다. 그곳에는 폭풍과 고요가 함께 있음에.’

신광철의 시 ‘늑대에게 사랑을 권하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랑은 무조건 작정하고 의도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건 필feel이 작동해야 하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랑이 부재한다. 사랑을 하면 인생이 달콤하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사랑을 하면 마음을 다치고 몸이 망가진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제 남녀 간 사랑은 큰 맘 먹고 해야 하는 도전이고 결연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 돼버린 것일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거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까지, 사랑의 쟁취와 도전에 관한 말은 부지기수였다. 누가 뭐래도 사랑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향기로운 꽃이라는 생각은 진리였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 한 번 못해 본 사람은 그저 불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사랑을 하면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폭력당하며 무엇인가 견뎌야 하는 취사선택 종목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로부터 일정하고 반복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마음이 행동으로 보이면 어느 정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두 사람이 한날한시에 사랑에 빠지는 기적 같은 일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든 그 마음을 먼저 보이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그때 구애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사랑을 구하는 몸짓을 하게 마련이다. 일정하게 계속되는 반복과 세뇌는 어느 순간 몸에 배고 중독된다. 사부작사부작 머릿속에 저장되고 어느새 마음에 깊숙하게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은 적당히 강요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인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흔히 어떤 작정이나 의식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반응 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한다. 중독은 나쁘거나 불온함을 구분하지 못하며 저항력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습관적으로 내 의식이 지배당하고 몸이 움직이면 어느 새 전부가 되는 것을 느끼곤 하지 않는가. 공부도 그렇고 습관이나 언어도 그렇지만 사람이 나누는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은 어쩌면 중독인지 모른다.

사랑은 표현하는 맛이고 그 사랑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맛은 오묘하다. 노력 끝에 쟁취하는 것은 무엇이나 성취감이 있지만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강렬한 것이 있을까. 그 끝에 달려있는 짜릿함은 새삼 말해 뭣하랴. 흔히 이성은 감정의 우위에 있고 세상은 이성이 지배한다고 하지만 감정을 건드리는 사랑의 언어, 사랑의 노래가 없는 세상은 더없이 삭막하기만 하다.

사랑을 권해야 하는 세상.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감이 열리고 마음이 떨리는 초개같은 사랑도 있겠지만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느린 사랑도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 있을 것이다. 권학시를 읊으며 한 시절을 채우고 어느 시간이 의미 있었듯이 사랑도 습관처럼 노래하고 권유하면 가능한 것일까. 그대 진실한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고 정결한 몸짓으로 사랑을 구하라. 어쩌면 진실 된 사랑 하나가 살풋이 웃으며 다가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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