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인류는 자유의지라는 선물과 능력을 소유해왔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모든 인간의 궁극적 운명은 결국 선택의 결과입니다.” 미국 소설가 앤디 앤드루스의 소설 ‘폰더 씨의 위대한 결정’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무엇인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것은 갈등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기에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온통 선택의 연속이다. 하물며 인생 대소사는 어떠한가. 그때그때 선택에 의해 달라지는 일들이 한 두 가지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은 선택이 아닌 낙착이라고. 아마 선택의 책임과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기변호와 자기위안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명의 진화속도가 빨라지고 다변화된 세상이 진행될수록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은 실종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보통은 독단적인 선택에 의해 공동체를 아우르고 지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눈다. 누군가와 의논하고 도모함으로써 공동체적 연대감을 이루고 사회적인 위치를 갖으며 결국 개인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나의 차선책이, 함께 하는 선택에서는 최선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럴 듯하다.

무난함이 갖는 사회적 동물의 속성에는 ‘눈치’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때론 그 눈치로 인해 어떤 결과로부터 면책을 받을 때가 있기에 그 눈치는 삶에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한다.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라는 적당한 온건주의 사상이 자기 결정권을 상실하게 만든 것일까. 급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단적인 결정을 회피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일에서조차 결정을 미루고 망설이며 장애를 겪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메이비족이라는 신생부류로 분류됐다.

갈수록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안에 품고 있는 것을 앞서는 시대다. 쉽게는 매일 입는 옷이나 음식, 자동차의 종류와 색깔, 사는 동네까지도 나의 고유영역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며 산다. 자본주의가 이뤄낸 불합리한 성과일까. 아니면 결국 그 보여짐이 결정 장애자가 되는 초석이었을까.

사지선다형 시험에 길들여진 세대다. 한 개의 질문에 보기 4개가 있으면 그 중 답 하나를 고르면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확신적 정답을 표시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얼렁뚱땅 운 좋게 얻어 걸리며 점수를 올리기도 한다. 모르면 여지없이 틀리는 답보다는 다분히 인간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확신 없는 정답에 망설이고 있다가 그나마 제시 된 보기 4개는 막막함을 덜어주기도 했을 것이니 말이다.

어느 심리학과 교수는 “결정 장애가 일어났을 때 남에게 물어보는 것은 사소한 것까지 정답을 맞히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심리”라고 정리한다. 매사 “한번 실수하면 ‘끝장이다’라는 분위기다 보니 사소한 옷과 음식 메뉴까지 마치 시험 답처럼 정답을 고르고 싶은 심리일 것이다. 충분히 공감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철학자는 물론 문인, 가수들까지 주구장창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했다. 거기에는 오롯이 내가 주체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내가 선택하는 결정권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누군가에게 내 일을 선택하고 결정해 달라고 매달린다. 심지어 인간관계를 맺는 범위나 유형까지도 자기 스스로 결정을 못한다. 누군가와 의논하고 그 선택을 양도한다. 간혹 주위에 유난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명쾌한 해답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 우린 그런 사람에게 종종 내 인생의 중요한 일과 내 일상의 자잘한 소품까지 결정을 양도한다. 남의 인생까지도 결정해줘야 하는 그들이 진정 이 시대의 전사인가. 이때 내 인생을 누군가와 나눠 사는 것이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신중해도 선택은 언제나 오류를 동반하고 우리는 어쩌면 반복되는 오류 속에서 정답을 찾다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인생의 결정권은 온전히 나에게만 있는 것이기에 좀 더 책임감을 갖고 나의 주체성을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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