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TV속 카피 한 줄이 어느 날 강렬하게 귀에 들어왔다. 사람이 숨을 쉬고 사는 동안 자고로 노동은 신성한 의무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으로서 그 배짱에 놀랐다. 하지만 한 편으론 버거운 삶에 대한 역설과 간절함이란 생각에 짠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격정적인 삶의 중심에서 충분히 치열하게 살고 있기에 내던질 수 있는 투정과 아우성이 아니었을까. 나도 한 때 아무도 모르는 산 속 깊은 암자에서 그저 숨만 쉰 채로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내리 3일만 누워 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으니까.

인간에게 부여된 특징은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 사유의 결과를 삶에 반영했기에 세상은 아직 인간이 통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그동안 부여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범위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끝없이 연구하고 고민하고 불협화음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루 다르게 괄목할 만한 문명을 이루어 놓았다. 거기엔 육체적으로 더 편해지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싶은 궁극적인 희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욕에 실린 무절제한 발전은 결국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무력감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을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머릿속에 담아야 했고 너무 많은 행위를 해야 했다. 그에 따라 빛나는 결과물을 내 놓아야 했다. 그것이 결국 조바심과 강박감에 빠지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속도 조절을 하지 않은 질주의 끝에는 탈진만 남아 버린 모양이다. 매사 잘해야 하고 그에 준한 성과물을 내 놓아야 한다는 강박이 급기야 활동 능력에 염증을 불러일으키고 부침을 줬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역으로, 이루어 놓은 것들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고 급기야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무기력감에 빠지게 만든 것 같다.

번 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소진 증후군). 지나치게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것을 뜻하는 용어다. 그 증상으로는 건망증, 불면증, 불안증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확장된다. 우리나라 직장인 10명중 8명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증상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삶의 활력을 잃고 심신에너지 고갈에 빠진 이유가 뭘까. 아마 지나치게 빠른 성장을 꿈꾸고 가시적인 결과를 지향한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또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일에서 보람을 찾고 일의 성과가 행복의 척도가 되는 풍토 때문일 것이다. 또한 휴일이, 휴식이 아닌 충전의 시간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인 청년들은 힘이 넘쳐나고 의욕이 충만한 생에 가장 에너제틱한 나이다. 그런 그들이 틈만 나면 그저 잠만 자려 하고 밖에 나가 활기 있게 움직이는 것을 꺼려한다니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스스로 활동을 자제하며 무기력에 빠진다. 점점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고 다리 뻗대며 투정하는 아이가 돼갈 뿐이다.

세상은 아무것도 안하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에 맞춰 격렬하게 무엇인가 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진을 빼고 넉다운 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격렬함은 역동적인 의욕을 아우르는 말이다. 삶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격렬한 욕망이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것으로 방향의 오류를 일으켰다. 아무것도 안 할 권리는 순전히 내게 있으며 내가 판단하고 허락하는 일이다. 하지만 숨을 쉬고 있는 한,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의 뒤에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지가 깔려 있을 것이다. 얼마간이라도 진정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을까. 그 멈춤을 단순히 비생산적인 소모라고 치부할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윤기를 위한 도움닫기 시간이라 생각하자. 과감하게 아무것도 안할 수 있는 용기와 시간, 더 나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하리라.

저작권자 © 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