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2018년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말하면서도 바뀐 새해맞이에 분주하다. 빼먹으면 큰일 나는 연례행사처럼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이른 새벽 산에 오르고 가족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덕담이 담긴 연하장도 보냈다. 또한 스마트폰에 밀려 자리를 잃은 지 오랜, 꽤나 귀하게 얻은 종이 달력도 조금 비장한 마음으로 걸었다.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다이어리와 탁상용 달력을 선물 받았다. 다이어리 내장이 혁신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걸 보니 스마트 폰에 위기를 느끼는 모양이다. 새삼 나의 사소한 일상과 순간순간 일어나는 짧은 사유의 공간으로 잘 활용하리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메모 하는 습관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다이어리나 수첩이 없어도 별달리 아쉽지는 않았다. 외출 시 가방에 작은 수첩도 따로 챙기지 않는다. 무슨 고집인지 가능하면 머릿속에 저장하려고 했다. 기억력이 꽤나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면서, 따로 글자로 기록해 두지 않아도 내 일상이 크게 착오를 일으키거나 질서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나는 내 머리를 믿고 의지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다이어리나 수첩이 손에 들어와도 처음 몇 장만 기록될 뿐 거의 빈 공간으로 남은 채 1년을 마무리한다. 그래서 몇 권의 다이어리는 그렇게 거의 여백만 안은 채 책꽂이에 꽂혔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했던가. 요샌 시나브로 떨어지는 기억력을 실감한다. 불과 1~2년 전 까지만 해도 지인의 자동차 번호는 물론, 웬만한 전화번호정도는 다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일주일에 한 두 번 보는 가까운 사이에도 자동차 번호가 가물가물하고 심지어 우리 아이들 전화번호조차도 긴가민가할 때가 있을 정도다.

젊은 시절, 시 여남은 편 정도는 능히 암송하고, 소설 몇 장도 외울 정도로 탁월한 기억력을 자부했는데 이젠 대중적이고 유명한 시 조차도 몇 구절은 가물거린다. 또한 소설의 작가나 주인공 이름도 헷갈릴 정도다. 어쩌다 노래 부를 기회가 생겨도 가사가 기억나지 않아서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딸아이가 주문한 떡라면을, 돌아서는 순간 라면이라고 외쳤던 일화는 영원히 놀림감으로 남을 듯하다.

스마트폰의 발명은 누가 뭐래도 혁명이었다. 가로세로, 평균 12cm 크기의 스마트폰이 가지는 위력은 너무나 위대하고 강력하다. 통화는 물론, 지식 충족, 은행 업무, 쇼핑까지 스마트 폰 활용에 미숙하면 그야말로 원시인에 문맹으로 치부 될 정도다. 특히나 요즘 내가 매료되고 있는 것은 메모리 기능이다. 길을 걷거나 운전 중일 때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기록할 수 있는 그 기능은 내게는 천군만마다. 단 한 개의 단어와 몇 줄의 메모가 한 편의 글이 되는 순간을 시도 때도 없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폰을 잃어버리거나 새것으로 교체 할 때 메모리도 사라져 버리는 폐단은 새삼 종이 다이어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꼼꼼하게 다이어리를 채우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그런 습관에 길들여진 사람의 삶은 더 없이 정리되고 정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가뜩이나 복잡다난한 세상에 짧으나마 해 놓는 한 줄의 메모는 일상을 엮어가는 데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좋은 매개가 될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모바일에 익숙한 현대인이지만 여전히 종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새해 첫 날, 다이어리 첫 장을 펼치며 무엇을 첫 내용으로 기록할까. 아마 새해 새 마음을 다짐하기도 하고, 가족들이나 지인들의 생일도 기록할 것이다. 또한 내 삶의 지표가 되는 좋은 글귀도 적을 것이고 구입하고 싶은 책 제목도 적을 것이다. 나만의 사유도 풀어 놓으면서 내면의 깊이도 늘려갈 것이다.

종이 다이어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마트폰 보다는 글로 쓰는 게 정리도 잘 되고 나중에 기억에 더 많이 남는다고 말한다. 망각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펴고 숨을 고르기 위한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해 추억을 느끼고 감성을 되받고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사소한 변화부터 떠나간 사람의 그림자까지 기록하면서 우리는 삶의 진솔함과 소중함을 품을 것이다. 이제 매일 채워져 가는 나의 다이어리에는 어떤 모습과 어떤 생각들이 들어앉게 될까. 기쁨, 슬픔, 절망, 그리고 분노까지도 소중하게 기록하다보면 한해의 말미에서 바라다 본 내 기억의 낙원에는 더 깊어지고 넓어진 내가 의젓하게 서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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