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나는 386 세대다. 386세대는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말로, 80년대 학번이며 60년대 생인 세대를 말한다. 주로 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를 통칭한다. "386 세대"라는 명칭은 원래, 80년대 이후 널리 사용되었던 인텔 등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탑재한 컴퓨터의 명칭이었던 286 컴퓨터, 386 컴퓨터 등의 용어에서 비롯된 조어다.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세대’라는 용어의 정의를 엄격히 적용하면, 그 정의에 가변적인 나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해가 바뀜에 따라 386세대라 불리는 세대는 1990년에 첫 등장하여 2008년에 사라졌다. 그러나 통상적 시기로는 제5공화국 때 민주화 투쟁을 했던 대학생 또래들의 세대를 가리킨다. 나름대로 역사의 굴곡을 겪으며 대한민국의 기반을 닦은 역동적인 세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역사적인 위치 말고도 문화적인 면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의미는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를 장식했던 노래나 영화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대중가요의 중점이었고 영화나 연극도 시국이나 서사적인 내용보다는 눈물샘 자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런 대중을 선도했던 예술인들이 지금까지도 대중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386세대인 어떤 사람들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는 특유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좌 편향된 정치의식과 태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전 세대보다 훨씬 권위적, 그리고 극단주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현 세대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들만의 세계는 확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대들도 혁신적인 문화와 문명의 발달로 조금 시행착오를 겪었다. 문화를 받아들이고 접하는 속도나 방식이 촌스럽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천덕꾸러기가 됐다. 시나브로 달라진 영어 발음에도 무안당하기 일쑤고 대부분의 업무가 전산화되는 바람에, 타닥거리는 독수리 타법으로 모바일 세계에서도 고군분투하며 구박덩어리가 되며 어영부영 자리를 잃기도 했다. 또한 임팩트 있는 짧은 글이나 독특한 외계어에 적응하지 못하며 소통 단절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파격적인 패션이나 트렌드에 못 미쳐 아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와 뮤지컬에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들의 발걸음이 잦다고 한다. 평균 객석 점유율이 85% 정도나 된단다. 또한 TV에서는 80~90년대에 활동했다가 이제는 아스라이 잊혀가는 가수와 노래들을 다시 보고 듣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다. 386세대의 조용한 귀환일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세대, 이제 중장년이 되고 경제력이 갖춰지면서 문화를 접하는 행보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정신적, 경제적 여유 두 가지가 동시에 충족되자 일어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몸소 겪어 낸 격동의 시대를 다시 보면서 빛바랜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리라. 그때 그 시절 우리들 이야기라는 동질감이 그들의 감성을 건드렸을 것이다. 또한 그들만의 진지함으로 그들만의 영역을 다시 구축하고 싶은 열망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1987’년을 보면서 그 시간 그 상황에 다시 분노하고, 희생으로 사라진 친구 같은 열사들을 기린다. 또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보면서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 시절의 문화적 풍미를 한껏 느끼기도 할 것이다.

386세대는 젊은 시절엔 세상의 부패를 없애야 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세대로서 톡톡히 역할을 했지만 이젠 LTE급 신세대를 이해 못하며, 아니 쫓아가지 못하며 꼰대가 됐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어도 사회에 순응해야 한다. 또한 부패를 싫어하고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다시 그들만의 정서를 찾고 적응하려는 노력이 애잔하기도 하다. 조금 느리고 조금 고집스러우면 어떤가. 빛바랜 정서를 애써 고수하고 찾아가면서 또한 달라지는 세상을 받아들이며 어느 한 시절을 누렸던 그들만의 저력을 또 발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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