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일상적 공포. 요즘 우리 사는 세상의 실정이다. 특별히 타인에게 원한 산 일이 없어도, 또한 아귀다툼이 없었어도 불시에 묻지마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문명이 주는 혜택에 무차별 환호했고 욕심껏 수용했다. 분명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로 인해 마음을 다치고 몸을 상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로 인해 인성이 메말라가고 육신은 피폐해지고 있다고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웃사촌은 먼 친척보다 낫다고 했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첫 번째 명분과 척도가 될 정도로 이웃은 내 곁의 친밀하고 소중한 울타리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담장 하나 사이의 물리적인 범위 안에서도 서로 피해 보지 않으려고 경계를 하고 견제를 하는 상황까지 온 것 같다.

층간 소음에 극단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간혹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며 원수가 되기도 한다. 편리함과 신속함의 선봉에 선 택배기사는 때론 흉기를 든 흉악범으로 돌변해서 현관문 여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도로 위에서 진로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력에 공포의 질주는 다반사고 늦은 귀가에 택시도 때로는 공포의 대상으로 돌변한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어떤 이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피차 서로 대응이 지나치고 특별히 예민해서 그렇다고 지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정도와 경우만 다를 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상적 공포를 안고 사는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언제부터 우리의 삶이 이렇게 경직되고 예민하게 되었을까. 이웃 간의 다정한 인사도 때로는 장소를 생각해서 해야 하고 택배를 받을 때도 다소 긴장을 해야 하고 때론 최소한의 대면마저 회피하려고 한다. 늦은 밤에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집 앞 마트라도 갈 때는 더 큰 결심을 해야 하고 동행자의 필요성을 느낄 때도 있다. 또 밤늦은 시간에 택시를 탈 때 무엇인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하고 끝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한 두 번의 경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반응이고 대처다. 어쩌다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분명 지금 직면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공포는 비단 우리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권총과 소총이 10만 원대에 팔리고 있고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잊을 만하면 심심찮게 총기로 인한 인명사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이런 사태를 접하며 '총이 아니라 정신병이 주범'이라고 근본적인 진단을 하지만 달리 막을 방법까지는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의 폭력과 현실 폭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한 학자는 미디어에서 폭력을 접할 기회가 많을수록 현실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것을 '끔찍한 세상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자본주의로 부를 축적한 기득권층이 자본주의 이외의 체제를 이런 '악마‘ 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바야흐로 도래하는 AI 세상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많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접하게 될지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세상 속의 흐름은 물론, 사람들도 모두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모 아니면 도다. 쉽게 추스릴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발현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패륜을 저지르며 인명을 살상하는 일이 예사다. 이런 비극적인 세상이 젊은이들에게서 원대한 꿈을 빼앗고 소시민들에게 희망의 폭을 좁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매일매일 끊이지 않고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는 세태와 점점 더 잔인해져 가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작은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나날이다. 마음이나 몸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하루 일을 마치고 그 하루의 끝에 누워 온전한 가벼움으로 깊이 잠들고 또 다시 별 일 없었던 어제처럼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지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행복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고 또한 그 소소한 행복이 절실하다. 어쩌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꿈이 되는 세상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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