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개천에서 용 나왔던 시절, 아득한 전설 같지만 그 때는 차라리 살만했을까. 물리적인 가난은 사람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고 불편을 겪게 만들지만 희망까지 빼앗지는 않았다. 지금은 힘들어도 노력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살아 갈 의욕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는 아비의 꿈과 그 의지를 이어받은 아들은 그에 걸맞게 노력을 했으니 살림 펴지는 일은 오히려 지금보다 쉬웠다. 하지만 이 시대의 가난은 숙명처럼 대물림 된다. 비빌 언덕이 없으면 사회적인 성공이나 물리적인 부를 이루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됐다. 단순하게 나의 노력만으로는 신분이나 부의 수직 상승이 일어나는 기적 같은 반전은 쉽지 않다.

교육은 성공 사다리라는 것이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교육이 계층을 이동 시키던 수단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젠 결국 그 계층을 고착화 시키는 원인이 됐다. 언젠가부터 계층도 세습된 세상.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청년들에게 더 없이 어려운 시절이다. 더구나 가난한 부모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욱 자괴감만 커지고 절망만 늘어난다. 그저 계단을 밟듯 획일적인 교육기간을 거치고서는 지지부진한 인생만 기다리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또한 재력 있는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면 치열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들어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할수록 원하는 것도 많다. 끝없는 스펙은 막말로 돈 없으면 쌓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요즘 청년들에게 성공의 가장 큰 요소는 부모의 재력이라는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공부를 하는 데도 돈은 반드시 필요한데, 가난한 집 자식은 공부를 하면서 생활비나 학비도 스스로 조달해야 하니 어떻게 부모의 원조가 있는 사람들과 경쟁이 되겠냐는 말이다.

글로벌한 힘을 가진 일본이나 미국에서조차도 성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노력을 꼽는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부모의 재력이라니, 근본적인 패턴의 전환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예전 똑똑한 자식 한 명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다반사였다. 지난한 형편을 가진 부모와 줄줄이 많은 형제들을 건사하면서 한 세상까지 흔드는 우리의 오빠 언니들의 이야기는 비단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만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힘든 조건이라도 본인이 노력만 하면 인생이 달라졌던 이야기들. 분명 개천에서 용 나왔다.

교육계 학자들은 물론, 부모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대학을 가기 위해 숱하게 변경되는 입시제도에 불합리한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학은 무조건 가야하는 곳으로 인식되다보니 유명무실한 대학들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부실 경영으로 인한 교육적 효과도 미비한 상황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매년 달라지는 입시제도에 학생 당사자나 학부형들은 쫓아가느라 바쁜 형상이다. 수시 입학 전형은 또 다른 병폐를 나타내며 거기서도 부익 빈의 대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매번 결과는 있는 집 자식들에게 유리한 꼴이다. 시험을 치러서 성적에 따라 또는 적성이나 꿈에 따라 자율적인 선택권을 갖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공평하지 않을까.

16년간의 정상적인 교육 절차를 밟고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사회에서 선택받지 못한 고급 인력들이 실의에 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잣대에 의해 패배자로 분류되고 있다. 또한 앞가림 못한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들의 노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 자립과 성과가 그 결과물로 나타난다. 인생은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근본적인 성공 여부를 물리적 여유로 판가름 하면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결국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고 공부를 한다는 말에는 크게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교육적 제도 개선, 학력 위주에서 탈피, 그리고 공교육 위주의 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개천에서 용 나는 그런 기적 같은 세상은 오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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