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현대인들의 화두와 목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여기에 잘 죽는 것이 포함되고 있다. 언급 된 ‘잘’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고급 음식점이나 백화점에서 또는 해외에서 비싸고 깨끗한 고급 음식을 특별 주문해서 먹자는 것이 아니다. 또한 넓고 좋은 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자는 것이 아니다. 내 몸에 맞는 음식을 잘 먹고 내 처지에 맞게 마음 편히 사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에 잘 죽는 것. 무엇보다 잘 죽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망설여진다. 보편적인 판단이나 잣대를 대기에는 죽음의 정의나 본질이 다분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무엇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부분이 상당하다. 흔히 말하듯 누구에게나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마감의 순간은 다양하다. 예기치 않은 사고사도 있을 수 있고 느닷없이 닥친 병사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불가피 한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몇 십 년 살다가 딱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같은 조건에서 죽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존엄사가 인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 엄중하기는 하지만 자율적인 선택아린 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생명의 평등과 존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언젠가 들은 얘기가 있다. 오랜 지병을 앓는 남편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아내가 남편의 위중함에 병원 측으로부터 연명치료의 한 방법을 권유받자 혼잣말처럼 내 뱉었다고 한다. ‘고쳐주지는 않고 살려만 놓는다.’고. 가슴 아프지만 공감 되는 독백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말 그대로 연명은 본인은 물론 주변인들에게도 고통일 뿐이다.

얼마 전 104세의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존엄사를 선택해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것도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말이다. 한 생명이 사라졌다는 슬픔보다는 왠지 모르게 경외감이 느껴졌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10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지고 시력이 약화되면서 자신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졌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자의적으로 움직이기 어렵고 잘 볼 수 없는 신체적인 약화가 얼마나 그를 절망에 빠지게 했을까. 그것은 단지 살아 있을 뿐이지 생활이 없어졌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그냥 하루 종일 앉아있거나 누워 있는 것이 일과일 뿐이라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 그는 평소에도 죽음이 오면 환영하겠다고 말할 만큼 그는 삶의 한 자락에 있는 죽음에도 긍정적이었다. 그의 선택은 분명히 존엄사에 대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메 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삶도 노화도 죽음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자연에도 계절이 바뀌며 자연스럽게 순환 하듯이 삶도 죽음과의 순환일 것이다. 웰 다잉은 분명 인식이나 관점의 변화다. 죽음의 순간에 관점을 변화시키면 분명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죽음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서 무엇보다 잘 죽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언장’이나 ‘엔딩노트’등을 미리 작성해보며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이 또한 분명 인식의 변화다.

 

장수국가인 일본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웰 다잉 교육이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새 보편화 되고 있다. 삶과 죽음은 어우러져 있고 삶과 죽음은 같이 가는 일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노후준비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먼저 떠 올린다. 물론 중요한 일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중요하다. 죽는 순간까지 건강을 유지하다가 물리적, 정신적 한계를 느꼈을 때 스스로 죽음의 방법과 시기를 선택하고 정하며 행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삶이 아닐까싶다.

저작권자 © 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