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옛말에 재산이 많으면 결국 자식들 분란만 일으킨다고 했다. 재물 복 많은 사람들을 향한 시샘이거나 없는 사람들의 자기위안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 시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은 상전이고 많은 재물은 무엇보다 우월한 삶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많은 재산은 부모와 자식 간, 또는 형제간에 가장 첨예한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하고 있다.

항간에는 “마지막까지 돈을 쥐고 있어야 자식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거나, “요즘 아이들에게 재산 많은 할아버지가 가장 훌륭한 빽“이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흘러 다닌다. 손주들에게 기십만원짜리 가방에서부터 기백만원짜리 외투를 사주려고 백화점에 몰리는 돈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그들이 금수저, 흙수저 구분의 가시적인 원조였을까. 애초 그런 재력 없는 소시민들에게는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풍경이다.

재산다툼을 하며 법정까지 가는 부모 자식의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듣게 된다. 미리 자식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별다른 효도를 기대했다가 그에 미치지 못한 아버지가 재산 반환 소송을 하고 다른 형제에게 재산을 몰아주는 아버지를 고발하는 아들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일반적이 아닌, 모두 상상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급기야 효도 계약서를 쓰는 세상이란다. 자식에게 막연한 부양이 아닌,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부모는 정기적인 금전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명시된다고 한다. 여기엔 모든 자식들의 양해와 동의는 필수며 자식 부부의 합의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연대 보증인을 세워 안전장치를 하면 그 계약서는 완성된다. 종이 한 장으로 효를 확인하는 절차다. 효를 담보하는 세상이 분명하다.

우리 같은 소시민들에겐 그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고 혀 몇 번 차고 말 일이지만 수백억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남 얘기는 아니리라. 가족들이 법을 찾게 되기까지는 이미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다음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부모가 자식에게 줬던 재산을 다시 돌려달라고 까지 하겠는가. 도의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까지 온 것일테다. ‘효도’라는 따뜻한 글자에 ‘계약’이라는 다소 차가운 말이 뒤따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깃 들었을까. 하지만 얼른 듣기에도 재산과 효도를 맞바꾸겠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지인은 ‘쓰죽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내가 번 돈 다 쓰고 죽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들 모임의 준말이다. 겉으로는 다소 가벼운 말이지만 안으로는 무수한 의미와 사고가 담긴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벌고 아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남보다 더 아늑한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인생의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기던 시대와 세대가 있었다. 비록 나는 고생했지만 내 자식만은 고생 없이 편히 살게 하고 싶은 부모세대들의 눈물겨운 사랑이다. 자식 또한 부모가 주는 재산을 당연한 듯이 덥석 받았다. 물론 그들에게 늙은 부모 부양은 의무였다. 하지만 이젠 부모도 달라지고 자식들도 달라졌다. 부모라고 자식에게 무조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도 아니고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산한다. 자식들도 효의 밀도나 강도를 노골적으로 상속분과 비례할 것을 드러낸다. 세상이 변한 것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라라지만 부모 자식 간의 본능적인 사랑마저 변질 된 것 같아 우울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같은 서민이야 가진 재산이 없어서 자식에게 나눠줄 것도 없으니 오히려 면구한 일이고, 그러니 나란히 변호사 사무실 찾을 일은 없겠지만 간혹 다른 일로 자식들의 이성적인 판단과 냉혹한 척도 앞에 간간히 가슴 서늘할 때는 있다. 어른들도 내 인생을 찾자고 나서고 자식은 더욱 제 세상을 품는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자식은 부모 생의 멋진 선물이었으며 훌륭한 자양분이었다. 그들에게 부모 또한 넉넉하고 따뜻한 언덕이었으리라. 그렇게 서로 존재 인정하며 살면 그 뿐, 종이에 조건이나 의무를 명시하며 마주 앉을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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