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차가운 것을 함께 먹으며 따뜻한 사이가 되는 것.’ 어느 작가는 팥빙수 한 그릇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빙수집 앞을 지나거나 직접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구절이다. 참으로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에 금세 마음이 따뜻해지고 공감이 된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차가운 음료나 시원한 음식은 누구에게나 환영받는다. 특히 하얗게 갈린 얼음 가루를 듬뿍 뒤집어쓰고 이국적인 과일을 품은 빙수 한 그릇은 더위를 날리는 음식으로는 압권이다.

이름만으로도 몸이 오싹해지는 유명 빙수 가게는 매번 앉을 자리가 없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진풍경이다. 한 스푼 듬뿍 퍼서 먹는 빙수의 시원함은 땀 흘리며 기다린 시간쯤, 너끈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메뉴판에 적힌 이름들은 한국어와 외국어가 반반씩 섞인 퓨전이다. 특히 찰떡을 포근히 감싼 콩가루의 궁합은 얼핏 불협화음 같지만 그런대로 오묘하고 신기한 맛을 낸다. 가격도 만만찮다. 대부분 한 끼 밥값을 호가한다. 심지어 유명 호텔에서는 일반 가게보다 몇 가지 재료를 더 얹어 한 그릇에 5~6만 원 넘게 받는다니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다.

예전 빙수는 기껏해야 질퍽하게 삶은 팥에 설탕 듬뿍 넣은 것이 전부였고 거기에 강판에 직접 간 얼음알갱이를 덮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사이 수십 가지 아이스크림이 비집고 들어와 눈과 입을 호강시키더니 이젠 럭셔리한 과일토핑의 빙수가 대세다. 멜론부터 바나나, 망고, 체리까지 각종 외국 과일은 물론, 얼음까지 우유로 만들어 비주얼이나 영양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팥만 넣은 오리지널 ‘팥빙수’는 알게 모르게 천덕꾸러기가 됐다.

시나브로 변해 가는 것이 먹거리다.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입맛도 변했다. 그저 무조건 배부를 만큼 양이 많은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으나 이제는 질이나 비주얼을 따지는 추세다. 한 번을 먹고 한 개를 먹더라도 좀 더 고급스럽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겠다는 의식의 변화다. 그러다 보니 관련업체는 앞 다퉈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다하다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신종 직업까지 생겨나서 고기 한 점, 채소 한 개도 예술적으로 치장하고 장식하며 사람들을 미식의 늪에 빠지게 한다. 빙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원하고 달콤하기만 한 음식에서 영양을 고려하고 모양도 예쁘게 해서 한 계절의 트랜드 음식으로 재탄생 시켰고 급기야는 여름 한 철이 아닌, 4계절을 망라한 고급디저트로 자리매김했다. 그때그때 제철에 나는 과일위주로 부지런히 업그레이드하여 출시하고 겨울에 조차 ‘한겨울에 먹는 빙수야말로 별미’라고 부추긴다. 오늘도 한낮의 더위가 꺾일 줄 모르고 기승을 부렸다. 빙수 집은 여전히 문전성시고 에어컨 빵빵한 커피집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밤사이 열대야에 시달린 탓인지 자꾸 차가운 것이 당기지만 그조차 내성이 생겼는지 웬만히 차가운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꾸 “더, 더 강한 것…”을 찾게 되는 걸까. 빙수의 하얀 얼음 가루는 나날이 더 수북하게 쌓여 이름 그대로 설산이 되는데 기온은 내려갈 줄 모르고 갈증도 더해만 간다. 이러다 조만간 북극에 떠다니는 얼음 덩어리라도 껴안아야 할지 모르겠다.

문득, 동네 구멍가게 냉장고 안에 성에를 잔뜩 뒤집어쓴 채 빤히 바라보는 것이 있다. 사람 손을 타지 못해 살얼음이 살짝 낀 생수 한 병. 순식간에 시원함이 밀려들며 몸과 마음이 오싹해진다. 어쩌면 고급 호텔의 기만 원짜리 고급 빙수 보다, 전문 가게의 화려한 빙수보다 더 만만하고 속 시원할 지도 모르는 차가운 물.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 작열하는 여름 볕에 성실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마시는 냉수 한 병, 그 차가운 물 한잔 소박하게 나눠 마신다면 빙수를 함께 먹는 것 이상으로 따뜻한 사이가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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