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우리는 삶의 요소요소에 숨어 있는 몇 가지 즐거움들로 인해 다소의 고난을 이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을 움직이고 감정을 발산하는 놀이문화는 기본이고 눈으로 보고 말로 듣는 즐거움에 유혹 당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선택해서 그것들을 누리고 즐긴다. 그 중, 먹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보다 강렬할 것이다.

초근목피草根木皮시절의 설움을 갖고 있는 어르신들에겐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먹거리가 풍부한 시대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자성어조차 금시초문일 것이다. 먹을 것이 지천인 세상은 주식인 밥을 물리치는 상황까지 불러 일으켰으니 말이다. 제철이 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이젠 시도 없고, 때도 없는 먹거리의 양산量産에 슬며시 옛날 배고픈 시절에 먹던 재료 부실한 음식들이 그립다고 말한다. 아마도 음식 귀한 줄 알았던 그 때의 정서와 절박함에 대한 그리움의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때, 어느 시절이 되면 슬그머니 그리워지는 음식들이 있다. 봄이면 막 싹이 튼 보리 순을 잘라 끓인 보릿국이나 향긋한 냉이와 쑥을 넣어 끓인 된장국, 여름이면 우물물에 담가 놓은 수박과 어깨에 둘러 맨 통속에서 꺼낸 냉기 모락모락 한 아이스케키, 또 겨울에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먹던 단물 줄줄 흐르던 물고구마와 장독에서 꺼낸 살얼음 낀 시원한 동치미가 있었다.

그 중 가을이 되면 식도락가에겐 반드시 먹고 넘어가야 할 음식이 있다. 바로 전어다. 제철음식으로는 압권이 아닐까싶다. 전어는 남해안 및 서해안 곳곳에서 다량으로 잡히는 고기며 최근에는 전국 곳곳에서 전어축제가 열리면서 가을이면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어 한마리가 햅쌀밥 열 그릇 죽인다.', '전어 머릿속에는 깨가 서말이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등 전어와 관련한 속담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만 봐도 전어는 특별한 가을 음식임에 틀림없다.

고향에서는 매년 이맘 때, 가을바람보다 먼저 전어 소식이 들려온다. 올해도 그곳 바닷가에 사는 친구는 일찌감치 축제 소식을 알려왔다. 가을바다의 반짝이는 물비늘과 거기에 더 반짝이는 전어비늘로 인해 고향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으리라 싶어 덩달아 설렌다. 하지만 이어 태풍으로 축제는 무기한 연기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태풍은 조용히 지나갔고 축제는 유명무실했지만 전어 맛을 보기엔 무리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수산시장이 있다. 그곳 또한 이쯤엔 전어 회를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나 또한 고향을 가지 못할 때면 으레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한두 차례 그 긴 줄의 지루함을 즐긴다. 회는 물론, 전어 구이의 고소함도 좋고 살 듬뿍 넣은 회덮밥도 그렇다. 하지만 싱싱한 전어를 깻잎이나 상추 그리고 생마늘, 고추와 함께 쌈장을 얹어 먹는 맛이 그만이다. 노릇하게 황금색으로 변한 전어구이는 또 얼마나 고소한가. 또 돔배젓이라고 불리는 전어 창자로 만든 젓갈 또한 별미다. 따끈한 밥 위에 얹은 쌉싸름한 젓갈을 노란 쌈배추에 싸서 먹는 맛이라니.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렇듯 버릴 게 없어 머리까지 통으로 먹는다고 말하는 작은 생선의 위력. 머리에 깨가 서 말이라고 할 정도로 지방질이 넘친다니 영양가는 또 얼마나 높은가. 가을전어. 분명 또 하나의 가을 선물이다.

먹거리는 건강의 자양분이다. 때가 되면 기억나고 입맛을 당기는 음식은 일상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계절을 앞당기고 별 아쉬움 없이 돈만 있으면 언제나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몸의 풍요는 채워주나 마음의 배고픔을 채우기엔 2% 부족이다. 시골이 고향인 어르신들은 매캐한 연기 속에 구워먹던 감자와 옥수수, 심지어 덜 여문 보리를 논두렁에서 구워먹던 것도 이제는 아득한 그리움일 것이다.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 가면서 전어의 고소함은 이 계절에 절정을 이룬다. 차츰 짙어가는 계절감, 이제 전어 철이 끝나면 강화도 순무가 지천일 터인데 그땐 순무 한 다발 사러 강화도로 달려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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