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 작가 림태주는 그의 최신 산문집 ‘관계의 물리학’을 펴내면서 서두에 그렇게 적었다. 관계의 비밀스러운 원리와 은유를 별과 날씨의 천체물리학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나 또한 사는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관계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유독 늘 허둥대고 실패가 많았다.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고 아무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내 성격을 소심함이라거나 약간은 까다로운 성향 탓이라고 미리 바리케이드를 치고 합리화 시키면서 울타리를 둘렀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부터 조금 변하기 시작했다. 점차 말이 많아지고 심지어 낯선 사람들에게 흔연스럽게 먼저 말을 걸 정도가 되었다. 이런 내 모습에 내가 놀라기도 전에 가족들이 먼저 놀랐다. 처음엔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라고 하더니 이젠 ‘나이 탓’이라고 놀림 반, 걱정 반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관계에 나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사람 만나는 일이 잦다. 기존의 관계보다는 새롭게 관계를 맺는 일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일적인 부분에서 만나는 사람이기에 단발성일 때가 많지만 내가 현역에 있는 한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를 불확실함을 매개로 한 관계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욱 언행에 조심하게 된다. 자칫 이미지만 남긴 채 마무리되기 쉽기 때문이다.

나이는 거의 대부분 경험과 함께 나란히 가고 연륜은 자연스럽게 그 속에 경험과 실전을 담아 간다. 더구나 나이가 주는 촉과 눈치는 무시하지 못할 관계의 영향요인이다. 사는 것이 매사 이해가 얽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는 오히려 주저 없이 무작정 받아들이기엔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나이 들어 누군가로부터 물리적인 손해를 보거나 심리적인 린치를 당했을 때는 젊었을 때보다 훨씬 소화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자주 긴장하고 눈치를 보며 심리전을 한다. 그땐 얼마나 능구렁이가 되고 여우가 되느냐에 따라 손해 보지 않고 당하지 않는 똑똑한 사람이 된다.

요지경 세상에 순진함은 자칫 바보와 맥락을 같이하기 십상이다. 순수와 순진은 확실히 다른 개념이라고 말하는 데에 나 또한 이의는 없다. 손익계산의 잣대를 들이대며 매사 간보기를 한다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손해 보는 일은 없을지 몰라도 그 관계의 폭과 깊이는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리 저리 재고 따져서 얻은 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될 리가 만무다. 관계의 성공은 결국 순수함과 진정성에서 가장 확실한 승기를 잡을 때가 많다.

무엇보다 간보기 할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순수함과 진심을 가지고 대한다면 결국은 환영받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뻔히 계산속이 보이는 사람에게 맥없이 동조했다가 바보취급 당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자리에서나 어떤 사람에게나 경계를 품은 채 경직되어 있다면 그 분위기는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절대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물론, 특히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에 대한 재빠른 간파가 무기가 될 수 있다. 속내를 정확히 읽어내는 독심술도 있어야 하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가도 관건이다. 음식은 짠지, 쓴지 미리 간보고 그에 따라 맞추고 취사선택할 수 있겠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하기에는 왠지 삭막하고 씁쓸한 방법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살다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거나 느닷없이 뒤통수 맞아 휘청거릴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매사 당하지 않겠다는 선전포고하며 간보기 하다가 다가가지 못한다면 인간관계의 폭이나 깊이에 치명적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짠 맛일까 쓴 맛일까. 하긴 매사 단맛이기를 바라기엔 내 삶의 그림자가 그리 어여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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