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24살 청년이 분진가루 날리고 소음 가득한 열악한 발전소 현장에서 업무 수행 중 켄베이어 벨트에 감겨 죽었다. 청년은 이력서 들고 아무리 헤매도 취업이 안돼서 결국 하청업체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성실히 일하며 정규직을 꿈꿨다. 하루아침에 외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부모의 눈물은 단지 한 개인의 슬픈 가족사만은 아니었다.

입사 2주짜리 신입사원에게 별 안전교육 없이 현장을 맡겼다고 한다. 하루 24시간 근무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다른 어느 곳보다 발전소의 근무조건은 참으로 열악하다고 한다. 대부분 외주업체에게 관리를 위임하는 입장이며 그것도 영세 외주 업자들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낙찰된다고 하니 하청에 또 그 하청을 받는 인생살이가 얼마나 신산할까. 이번 사고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영세한 외주 업체는 인원을 충원하기 어려웠을 테고 그러니 2인 1조의 근무는 근로자들의 염원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울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의 김 모 군, 제주의 생수회사 이 모 군의 죽음도 모두 2인1조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100만 명의 비정규직원이 있다고 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늘 일자리가 부족하고 그에 청년 실업자가 늘어나니 그것은 결국 대한민국 경제의 그늘이 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경영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회사들은 직접 채용을 외면하고 늘 외주를 통해 간접고용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파트 경비나 청소도 모두 용역을 통해 조달한다. 그러니 복지는 차후의 문제로 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근무조건이 갖춰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책임감도 없고 안전은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죽음의 외주화’라는 말이 실감 나는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애꿎은 생명과 안전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히 사회적 죽음’이라며 뒤늦은 개탄을 한다. 이는 한 개인의 비극에 불과한 일이 아닌, 우리 사회 전반의 비극임이 분명하다.

유럽은 산업안전사고가 일어나면 그 기업을 살인의 주체로 간주하는 ‘기업살인법’을 갖추고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고용한 회사부터 관계부처까지 쉬쉬하며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급급함으로써 한 노동자의 죽음을 더 처참하게 만든다.

그는 한 밤중 랜턴 하나 없이 휴대폰 불빛을 등대 삼아 2시간 가깝게 홀로 점검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죽음이 발견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야 112에 신고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사고가 났지만 그 컨베이어 벨트를 계속 가동하라는 비인간적인 지시까지 있었다고 하니 한 사람의 생명이 그토록 가볍게 취급됐다는 것이 너무 참혹하고 개탄스럽다.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하기 무색할 만큼 비정규직이 겪는 심신의 고통은 상상이 어려울 만큼 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열악한 근무조건과 박봉을 견디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일자리 창출을 화두로 삼지만 말처럼 쉽지 않을 뿐이고 정작 현실은 청년실업자만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갈 데는 어디인가? 모두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나 아니면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24살 어린 나이, 꽃다운 청춘이다. 인생 선배들은 실패가 되던 성공이 되던 뭐든 해보라고 말하지만 사회라는 바다는 그저 차갑기만 하다. 부족함을 가득 채워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최소한의 근무조건이나 처우개선을 요구하지만 그것도 목소리 높이지 못한다. 잃어버린 안전모를 다시 달라는 말을 못 하고 분진이 날리고 소음 가득한 현장에서 휴대폰이 비추는 불빛에 의존하며 한밤 중 일했던 청춘은 오히려 너무 성실해서 죽었다. 가난은 비단 물리적인 부족함만은 아니리라. 아무도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은 무관심과 불안전이 가난을 더욱 뼈저리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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