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화장은 예뻐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첫 번째다. 왜 화장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예뻐 보이고 싶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화장의 역사는 B.C 7000-8000년에 이집트인들에 의해 시작됐다고 한다. 사막에서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눈부심을 막기 위해 아이라인을 그렸고 사막의 바람을 막기 위해 개미의 알을 녹여 만든 크림을 발랐다고 한다. 아름다움보다는 기후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도 애초 추위를 덜 타기 위해 돼지기름을 몸에 발랐다고 하니 서양의 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아름다음을 위한 여자들의 무기로 그보다 더 강한 것을 찾기 어렵다. 단순한 화장술을 벗어나 거의 새롭게 변형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장으로 인한 한 사람의 Before와 After사진이 모바일 상에 떠돌면서 우리는 종종 웃으면서도 슬픈 감정을 느낀다.

우리 아이들은 집 앞 슈퍼에 우유 한 개만 사러나가도 맨 얼굴을 거부한다. 세수만 해도 충분히 예쁠 나이라고 누누이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화장 시간은 1시간을 넘기기 일쑤고 밥은 굶어도 화장은 빼먹을 수 없다는 의지는 확고하기만 하다.

화장은 주로 여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됐었고 구릿빛 투박한 피부는 남자다움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나 화장한 남성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물론 남자도 피부 보호 차원에서 스킨로션이나 선크림 정도 바르는 것은 관리 차원에서 오히려 독려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요즘의 기후 환경이 맨 얼굴로 나다니기에는 치명적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짙은 아이라인에 윤기 나는 립스틱을 바른 젊은 남자를 만나게 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유니 섹슈얼리티를 지향한다는 데에 굳이 테클 걸 일은 아니기에 부러 무관심한 척 하지만 선명한 색조 화장을 한 남자를 보는 건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고 민망한 것이 고지식한 내 관념 탓이기만 할까.

내가 화장을 한 것은 스무 살을 훨씬 넘기고부터였다. 로션만 바른 맨 얼굴로 다녀도 전혀 부끄럽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젊음에 대한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무엇인가로 가리고 칠하기 보다는 투명한 피부에 해맑은 웃음이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다. 요즘은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마저 화장을 한다고 한다. 10명 중 6명 정도가 화장을 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리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에 화장품으로 덫칠 한 얼굴을 보면 분명 이질감이 느껴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가장 아름다운 화장은 젊음이라고 했다. 분명 맞는 말이다. 나이 들면 어떤 고급 화장품이나 고도의 화장술을 발휘해도 젊은 사람들의 싱싱함과 탄력에서 오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에는 미치지는 못 한다는 것을 요즘 실감하고 있다.

나이 들면 남녀불문 피부는 탄력이 떨어지고 혈색 또한 나빠지기 마련이다. 그땐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방편을 취할 수밖에 없다. AI 시대답게 영구 화장을 하고 성형술을 이용해 주름을 없애고 늙은 피부를 재생하기까지 한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본연의 내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사람 찾기는 희귀한 일이다.

나의 본 모습으로 경쟁력을 갖자는 말은 분명 쉽게 할 말은 아니다. 사람은 어차피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획일적인 모습을 한 채, 무작정 이 시대의 요구에 편승하는 것은 조금 지양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청소년들의 화장 또한 모두가 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슬쩍 합리화 하며 나의 개성을 소멸시키는 것은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나만의 개성을 간직하면서 내 본연의 자아와 소신으로 이 세상과 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이 진정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젊음은 진심 훌륭한 화장품이라는 것을 나이 들어 안다는 것이 조금은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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