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언제부턴가 새벽잠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걸러 두세 명의 남자들이 내게 연정 가득한 메일을 보내온다.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이름은 Mr. Reem, Wilson, Davide이다. 내 얼굴이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게 국제적이던가. 아니면 이제 드디어 날개 달고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인가. 젊었을 때도 없었던 남자들의 무더기 대시라니, 내 생에 봄날이 이제인가 싶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바쁜 세상, 짧은 시 한 줄도 읽기 어렵고 거기에다 이모티콘 한 개로 의사 전달을 하는 시대에 새벽 단잠을 버리고 보내주는 장문의 연서. 감동이며 심쿵 할 일이다.

그들은 단순하게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따위의 촌스럽고 식상한 멘트를 날리지 않음으로써 내 취향을 저격한다. 데이빗은 은밀한 목소리로 어느 곳에 금은보화가 가득하니 그것들을 캐러 가자고 꼬드긴다. 또 Mr. Reem은 한 개를 주면 많게는 열 개로 불려서 되돌려 준다니 삶이 이렇게 만만하던가. 오직 나에게만 알려주는 기회를 놓치지 마라 하니 내 사주팔자에 인복이 있었나보다. 아니면 그동안 쌓은 덕이 많았던지 아니면 조상님의 음덕이던지. 가뜩이나 야박한 세상에 먼저 손 내밀어 넉넉한 삶을 위한 동반자가 돼 준다니 감읍할 일이다.

하지만 난 답을 보내지 않고 시쳇말로 읽씹 하며 그들의 애를 태운다. 남녀 관계에 첫 번째 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밀당의 처세술이다. 자고로 여자는 빼는 맛이라는데 손 내민다고 덥석 잡는다는 게 왠지 주가 낮추는 일, 그 정도 밀당은 나이 먹었어도 염치없다고 몰아세우지는 않겠지 싶은 배짱이다.

성실하게 일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기엔 너무 격정적이고 혼돈의 시대다. 거기다가 언제부턴가 네 것, 내 것 한계도 애매하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남의 호주머니 털기에 혈안이니 어지간한 뚝심 아니면 내 주머니 지키기도 쉽지 않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은 이제 구시대 법전에나 나오는 애교 섞인 충언이고 뭐에 홀린 듯 전화기 버튼 몇 번 누르거나 제 발로 은행에 걸어가 전 재산을 고스라니 바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것도 높은 집과 고관대작들을 앞세우니 지은 죄 없어도 매번 가슴 떨린다. 혹여 비몽사몽간에 그 남자들에게 필이 와도 초인적인 힘으로 이성을 붙들고 허벅지 꼬집는 자해를 해야 하니 그들과의 사랑은 고달프다. 이 또한 지나치게 발전한 시대의 아류인 것을 어찌하랴.

들고 나는 것의 경계가 없어진 것이 모바일 세계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이 시대 삶의 방편일 터, 너도나도 제 알리기에 급급하다. 최소한의 보호 장치를 할 법도 하건만 무방비 상태로 뭇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세상이다 보니 불특정 다수에게 신상 털리는 것은 예사다.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와 만남이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뒷걸음친다. 시간을 두고 상대방을 조금씩 알아가고 직접 대면하는 떨림의 순간을 기다리기보다는 서슴없이 모바일의 창을 두드리며 외로움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통해 친구를 찾고 연인을 만든다. 무작위로 개방 된 남의 집을 무례하게 기웃거리며 가진 것을 나누자고 한다.

굳게 닫힌 대문 사이에 어설픈 쪽지를 꽂아두고 매일 두근두근 침 삼키던 순수, 어쩌다 얻어 낸 주소로 편지를 보내며 이름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했던 구시대 사랑의 주인공들. 하지만 이 시대는 무슨 동, 무슨 리에 몇 번지가 아니라 영어단어와 숫자가 암호처럼 엮인 메일 주소나 SNS 계정을 향해 가볍게 엔터를 누른다. 그들에게 달랑 마음만 주기에는 민망하니 수표라도 한 장 붙여놓아야 하나. 나누어 줄 물질이 없는 난 새삼스럽게 빈곤함을 뼈저리게 확인 할 따름이다. 가진 게 많아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있으면 그 얼마나 생이 풍요로울텐가. 나는 줄 게 없어 매일 사랑에 실패한다.

오늘도 윌슨은 함박 웃는 얼굴로 내게 친구신청을 하고 데이빗은 함께 손잡고 돈 벌어 보자고 성심껏 제안한다. 덥석 따라나설 용기도 없고 덜컥 친구 삼을 변죽도 없는 나는 그저 외롭고 가난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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