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이십대인 딸아이는 돼지코를 붙인 제 얼굴 사진을 카카오 톡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 놓았다. 멀쩡한 얼굴을 일부러 망가뜨려 놓는가 싶어 고슴도치 엄마인 나는 질색을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그것도 모자라 카이젤 수염을 그려 놓기도 한다. 대체 멀쩡한 제 얼굴에 낙서를 해서 희화화 시키는 심리는 무엇일까.

학창시절 꽤 착실했던 나도 유일하게 선생님께 지적을 당할 때는 언제나 책이나 노트에 낙서를 해놓았을 때였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질책이었다. 내 낙서는 대부분 어떤 도형이나 인물이었다. 상대방이 하고 있는 말이나 행위와 관련된 것일 때도 있고 또는 전혀 무관한, 말 그대로 딴 생각에 빠져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 그날, 그 시간의 내 심리상태이며 감정표현이었다.

낙서는 특정한 세대와 계층 구분이 없는 무조건반사에 가깝다고 한다. 어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이며 현상이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내재된 심리상태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은 낙서의 형태나 내용을 보면서 대상자를 파악하고 치료방법을 찾기도 한다고 한다.

낙서를 가장 흔하게 하거나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화장실이다. 내용은 읽기에도 낯부끄러운 음담패설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철학적인 고뇌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아마 철저하게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 유명 관광지의 조형물이나 술집 벽에 빼곡하게 적힌 낙서들이 지천이다. 대부분 사랑고백이다. 설사 곧 이별이 뒤따르는 연인들의 가벼운 사랑이었을지라도 또 그렇게 어느 구석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일종의 그 시간 그 사랑에 대한 언약이었으리라. 특히 남산 어느 곳은 연인들의 연서와 언약이 적힌 카드가 낙서 이상의 의미를 담고 묵묵히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직업의 매개가 사람인 관계로 늘 사람에게 감정을 다치고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가 있다. 맘에 들지 않거나 실수가 있더라도 관계를 단호하게 끊을 수 없기에 언제나 부아를 안으로 끌어안고 삭힐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낙서다. 그때그때 대놓고 할 수 없는 욕이나 독설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도화지에 적나라하게 끄적거린다고 한다. 순간 가슴이 뻥 뚫린단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효과다. 낙서가 나쁘다고 단정 지으며 말리고 삼갈 일은 아니다. 낙서가 억눌린 욕구해소 도구이고 숨겨진 존재감 발현이며 타인과의 간접적인 소통경로라는 말이 입증된 결과다.

언젠가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다툰 두 친구가 있었다. 난 2차로 옮겨간 술자리 벽면에 각자 성질 좀 죽이라는 말과 함께 두 친구의 이름을 쓰고 ‘영등포내란’이라고 적어두었다. 그 순간 인상 찌푸리고 있던 두 친구가 동시에 파안대소했다. 그 순간 그건 낙서 아닌 준엄한 화해의 메시지였다. 다소 불명예스런 흔적이라도 우리가 그날 그 자리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었고 지금도 웃으며 회자한다. 이만하면 낙서의 힘은 위대하지 않은가.

낙서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다. 그 유명한 알타미라 벽화에 그려진 낙서를 통해 그 시대의 민심이나 상황을 알 수 있고 역사적 시대적으로 훌륭한 가치로까지 여겨지지 않는가. 우리나라도 부산 감천마을이나 통영의 해파랑 길을 비롯해서 골목마다 벽화가 그려진 마을이 있다. 낙서를 넘어 예술의 한 경지로 진화한 것이 분명하다. 밋밋하고 칙칙한 시멘트 담벼락에 화사한 꽃이나 앙증맞은 아이들의 모습은 보는 눈도 즐겁지만 마을을 화사하게 만드는 역할도 톡톡히 한다.

낙서를 한자로 쓰면 落書다. 사전적 해석으로는 글씨나 그림 따위를 장난이나 심심풀이로 아무데나 함부로 씀이다. 그만큼 가치나 의미 없는 글이기에 떨어질落자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나 학자들은 개인의 내재 된 심리 상태 표출이나 쌓인 스트레스 해소방법으로 바람직하다고 한다. 유난히 개인적인 욕구 불만이나 사회적인 분노의 발현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낙서가 미약하나마 그 해소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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