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칼럼]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 검경일보 객원 칼럼니스트 이종석.

[검경일보 객원 칼럼니스트 이종석] 22일 새벽 2시 22분 서울대 중환자슬에서 폐혈증과 급성 심부진증으로 향년 88세에 서거하신 고 김영삼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에 경남거제에서 부 김충조<2008년 별세>와 어머니 박부연<1960년 별세> 사이에서 외동으로 태어나 부친의 멸치잡이 어장으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셨다.

특히 43년도 입학한 통영중학교에선 한국학생들을 차별 대우했던 “기타지만 수이치로‘ 일본인 교장에게 항의해 무기정학을 당했던 것을 보면 소년시절부터 남달리 정의감에 불타셨다.

조국의 해방 후 경남중학교로 전학 후 그의 책상머리엔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 놓아 정치지도자의 꿈을 키우셨다.

제1공화국에서 6공화국까지 현 정치사의 산 증인으로 고비 때마다 용기와 결단으로 얽히고 설긴 정치행로를 바꾸어 놓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최연소 25세에 정치에 입문하여 9선이란 다선의원으로 민주화의 횃불을 들어 6월 항쟁을 재야세력들과 함께해 사실 5공 정권의 종식으로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정부가 탄생하였다.

32년간 정치여정은 파란만장하였다. 특히 1963년엔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앞장서 서대문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으며 1969년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해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나 40대 기수론을 재창해 의정사에 새 물고를 트기도 했다. 1979년엔 군사정권에 의해 총제직무정지 가처분을 당하셨다. 특히 어록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 ‘대도무문‘이란 저항과 직설은 반세기 정치굴곡에 추종자들에겐, 디딤돌이 되었다. 특히 서슬이 퍼렇던 유신시절의 막바지인 1979년에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것은 당시 제1야당의 당수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민중혁명으로 팔레비왕정체제가 무너진 것을 언급하며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5공 당시는 가택연급을 당했지만 ‘몸을 같을 수 있지만 양심까지는 같을 수 없다.’는 촌철살인 ‘村鐵殺人’의 일성으로 박해하는 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재야 민주세력들과 협력하여 6월 항쟁을 주도해 87년 4월13일 대통령 전두환이 개헌논의 중지와 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이른바<413조치>를 발표하자 철회요구 성명과 재야와 공동투쟁을 연계해 5.23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이에 대해 5공 정권은 5만여 공권력을 투입해 원천봉쇄하였지만 18개 도시에서 일제히 일어나 시위로 차량행렬로 경적을 울려 6월 항쟁의 불을 끌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항쟁의 태풍의 눈이 된 명동성당을 점거 농성을 했고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하여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주의조치 시행을 약속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수습선언은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사실 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이 왔으며 대통령직선제. 88년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에 의한 공정선거 실시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 관련사범 석방. 지방자치제 등 등 8개항을 제시했다.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 92년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일제의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 민족의 자긍을 높였고 금융 실명제를 실시해 금융질서를 세워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렸고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제도를 시행해 부정부패에 칼을 들었다. 특히 역사 바로새우기에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수사에 불호령을 나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회를 발본색원해 군이 정치적인 야욕을 품지 못하게 했으며 OECD에 가입해 선진국의 일면을 보여주었으며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과 최초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김일성주석이 사망함으로 무산되었다. 만약에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면 오늘의 긴장된 남북의 관계가 안 되었을까? 그렇게 점쳐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매사에 공과가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당시 금융질서의 문란과 예측을 할 수 없어서 1997년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으며 재임기간 중에 갖가지의 불행한 사건이 돌출했으니 그것은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화재 등이었다. 또한 친인척 비리로 고심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좌우명처럼 ‘짠맛을 지닌 소금이 되자.’ ‘국민을 위해 모든 것 바치자.’그렇게 사시기를 원하고 행하셨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잘 날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계로 인문을 시킨 것은 대도무문의 큰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모든 시름은 내려놓으시고 편히 영면하소서! 민주화의 큰 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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