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환근.
1. 간만에 가족, 친지들이 모였다.
각자 사는 동네이웃들과 직장동료들의 민심을 물었다.
내 친지들은 촛불집회에 나간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중도보수성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닥치고 정권교체"였다.

박근혜에 대한 증오는 생각보다 더 깊었고,
민심은 여권의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어서 혹시나 박근혜가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사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상 현상처럼 민주당의 지지가 높은 각종 지표가 이해가 갔다.
이처럼 국민의 정권교체의지가 높은 한, 이번 대선의 변수는 크지 않을듯 싶다.

2.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나는 곧 그가 복귀할 것이라 예상했다. 호남과 재야를 기반으로 한 소위 범 민주세력의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한 번은 대통령을 해야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지 김대중이라는 지도자 한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난한 투쟁의 역사를 온전하게 마무리하는데 그것이 가장 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노무현대통령의 서거 후 우리사회에는 그 시절 소위 민주화세력에 버금가는 정치세력이 탄생했다.
부정적일수도, 긍정적일수도 있는 소위 "친노"라는 정치세력이 그 실체다.
근래들어 운명론자가 되어가는 나는,
좋던, 싫던 한 번은 이 세력의 恨이 풀려야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국가의 미래나, 혹은 내가 선호하는 정치의 비전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3. 문재인은 국민에게 딱히 보여준 것이 없는 지도자다.
등장할때부터 노무현의 20%를 안고 정치를 시작한 그는 그 이전 민주진영 지도자들이 보였던 특별한 격랑도, 오랜 인고의 세월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노"라 불리 우는 강고한 정치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국민의 강렬한 정권교체 의지와 한 번은 하고 넘어가야 하는 역사의 숙명이 만나는 자리에 어쨌든 그가 있다.

나는 당내에서 문재인을 지지하지도 않고, 그의 정치스타일이 썩 내키지도 않지만, 내 선호도와 작은 노력이 큰 흐름을 반드시 따른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그가 현재 같은 상태로 대권을 잡았을 때 매우 고생하게 될 것이라 예상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흐름이 당장 대선전까지 바뀔 거 같지는 않다.

4. 그러하므로 좀 겸허해졌으면 좋겠다.
인간적으로 그가 품격 있는 사람이란 걸 의심하진 않지만,
역사의 숙명 앞에 훨씬 더 엄숙하고,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인간적 품격과 역사의 소명을 받드는 정치인의 자세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소명의 자세는 그를 둘러싼 우호적 환경의 변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압도적 1등은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다리를 분지르지 않아야 한다. 설혹 빽 태클이 들어오더라도 지혜롭게 피하고, 넉넉하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온갖 우려와 조바심으로는 절대 좋은 1등이 될 수 없다.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므로 1등이 반드시 2,3,4등의 도움을 받아 해법을 만드는 행위다.

차기대통령은 그 누구라도 고전할 수밖에 없다.
단지 10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적폐뿐만 아니라, 정의감만큼 국민 삶속에 들어가지 못했던 민주정부 10여년을 포함하여, 30년 낡은 관습을 마무리하고,
언어의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세월 호 참사가 났을 때, 즉각 팽목 항으로 헬기타고 날아가서 진두지휘하고, 사죄하는 진실 된 대통령이 아니라,
참사가 날 수 있는 수백, 수천가지의 가능성들을 차단하고 대비하는 지혜로운 대통령이다.
그리고 관습과 통념을 바꾸는 그 일을 해냄에 있어 주변의 도움을 가장 잘 받는,
힘을 나누어 함께 문제를 풀 줄 아는 지도자다.

정치에서 겸허한 품격이란,
권력의 분산, 연대와 공존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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