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밤. 사전적 의미로는 ‘해가 진 뒤부터 날이 새기 전까지의 동안’이다. 밤에 관련한 사자성어나 속담을 찾아보면 주경야독晝耕夜讀(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뜻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공부함을 이르는 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말조심 하라는 의미).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는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에는 일찍이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이르는 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대책 없이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등. 대체적으로 피동적이고 주의력이 요구되며 가라앉음의 의미가 있다. 어려움, 조심, 살핌, 정적 등이 연상된다.

난 대체적으로 밤이 낮보다 더 좋다. 누군가는 지극히 비관적인 정서라고 염려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피동적이고 우울하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확연히 드러나는 낮보다는 조금 가려진 속에서 더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은 낮보다 밤의 모습이 더 화려하고 멋지다. 간혹 밤늦은 시간에 한강주변을 운전하며 달리 때가 있다. 높다란 빌딩의 화려한 네온불빛이 한강에 어리어 있는 모습은 고혹적이고 환상적이다. 낮의 복잡함과 디테일한 장식들을 불빛의 화려함에 적당히 감추고 실루엣만 드러낸 모습은 너무 아름답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이 말은 멜랑콜리하기도 하고 의미심장하기도 하고 다분히 은밀한 뉘앙스를 풍긴다. 또한 불합리와 불의가 도사리고 있고 음성적인 도모도 연상된다. 하지만 낮에 시행하고 도모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결과와 귀결, 마무리 의미가 있기도 하다.

특히 예술가들에게 밤은 창작의 온천이며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빛과 어둠의 화가 램브란트, ‘나는 정말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에 귀를 기울이십시오.’하며 밤에 창작의 의지를 불태우고 어둠을 칭송했던 시인 릴케, 그리고 [밤과 꿈]이라는 작품에서 밤의 고요함과 판타지를 표현했던 슈베르트, 밤하늘의 별을 보며 조국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꿈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도 밤의 예찬론자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처럼’은 한 시대의 아픔과 청춘의 고뇌를 대변한 노랫말이다. 긴 밤의 수맥을 핥고 영롱하게 맺힌 아침이슬은 반짝거리며 아름답지만 이슬 한 방울을 잉태하기 위해 지새운 긴 밤은 힘겨웠으리라. 하지만 긴 밤 동안 한 방울의 이슬을 만들었던 어둠과 적요의 시간이 아름다운 건 어쩔 수 없다.

긴 밤 지새우면 어김없이 새벽이 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긴 밤은 새벽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더 선명하게 오고 깊은 밤에 켜둔 촛불과 호롱불이 더 밝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빛은 어둠속에서 더 환하다. 어둠은 노력과 땀을 보듬고 키우고 있다가 담금질하고 숙성시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새벽에 내어 놓는다.

무엇보다 밤은 우선 쉼이 있다. 물리적인 생체리듬은 물론 정신적인 휴식까지 포함한다. 또 다른 말로는 역동적인 내일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밤은 흔들리는 청춘의 숙취를 품어준다. 노곤한 하루 끝에서 풀어 헤쳐진 비틀거리는 삶의 몸짓이 있고 진부하고 은밀한 사랑의 내통도 있다. 있지만 그 혼돈의 시간은 다음 날 아침 말끔한 정리의 카타르시를 예고하고 있으니 끌어안고 그 시간 안에 온전히 침잠하여 볼만 하지 않은가.

지금은 햇살 눈부신 한 낮이다. 서편으로 서서히 해가 기울고 있다. 밤을 향하여 조금씩 잃어가는 햇살마저도 숭고하다. 그리고 그 빛을 온통 껴안고 장렬하게 소등하는 밤의 시간이 거룩하다. 삶의 하루는 약간의 노곤한 고뇌도 있고 어깨에 걸린 피곤함이 깔린 벅찬 행로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뒤의 안온한 평화와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소유하기 위한 밤을 기대하며 한 낮을 견디고 살아낼 것이다. 오늘도 시간을 타고 흐르는 하루의 끝에 내일을 위한 휴식과 누군가에게 묻는 안부의 시간과 깊은 숙면이 있는 평화의 밤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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