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경일보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검경일보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조선사를 공부하다보면 요즘 말로 코드가 맞는 관심 있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한분이 정암 조광조 선생이다.

한 달간 남도 여행을 계획 하면서 정암을 만나러 먼저 화순으로 향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먹을거리 인데 오랜 경험으로 군청 근처나 재래시장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이번 여행에도 예외 없이 군청 앞 한정식 집에서 남도의 멋과 맛을 실컷 누리고 능주로 발길을 옮겼다.

정암을 생각하는 마음이 착잡해서 인지 하늘은 어둡고 흐린 날씨가 왠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능주에 도착하면 모든 주민들이 ‘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있는 곳을 물어보면 모두 알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고 자세히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 면사무소 신세를 졌다.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

성종13년(1482년)에 태어나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유교의 이념으로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 하였던 정치개혁가,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되기도 하고 또 다른 평가는 썩어빠진 정치를 바로 잡으려다 실패하였던 이상주의자로 평가되었다.

1519년(중종14)_ 11월 이곳 능주로 유배되어 온지 불과 한 달만인 12월20일 조광조는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 장소가 바로 ‘정암 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다.

조광조의 심정을 반영한 시(詩) 두 편을 소개한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와 같다고 쓴 웃음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 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

또 한 편은 절명 시(詩) 이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 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밝히 비추리. “
가히 가슴 아픈 절창이다.

조광조 하면 떠오르는 또 한명의 인물이 화순사람 양팽손이다.

그는 조광조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이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했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인연은 조광조가 진사시에, 양팽손이 생원시에 장원급제를 하면서 부터다.

처음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 했을 때, 유생들은 촌뜨기라고 놀렸지만 유독 조광조는 그의 학식과 재능을 인정해 주고 보호 해 주었다.

지금도 화순 땅에 양팽손이 머물렀던 학포당이 보존 되어 있다.

학포당에 서성이면서 시(詩) 한편 음미 해 본다.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 그림자 그림 같다.
강을 흐르는 물소리에 세상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 온 돛 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낚시 걷어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 구경을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 할 수 있고
여울 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고깃배야 오고가지 말아 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 “

더러운 세상과 소통하고 싶지 않은 결연한 자세다.

조광조의 사사 소식을 제일 먼저 안 사람도 양팽손이요,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도 양팽손이요. 어명을 어기고 죽음을 불사하고 시신을 거둔 이도 바로 양팽손이다.

비록 6살의 나이 차이는 나지만 인생의 선후배로 때로는 학문적 동지로서 이처럼 신의를 지키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인가?
잘 된 사람 곁에는 있고 싶어 하고,
안 된 사람 곁에는 멀리하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은 그 얼마나 쓸쓸한가?
요즘 정세에 더욱 기억해야 할 그들의 신의와 우정이 그리운 시대다.
자신을 진정 알아주었던 관중과 포숙아 처럼 두 선생이야 말로 짧은 인생의 성공한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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