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경일보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검경일보 객원칼럼니스트 서문숙(역사여행가)] 추로지향은 맹자가 추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옛날부터 성현을 존경하며 도덕을 가지고 학문을 숭상하며 예의를 지키는 고장을 추로지향이라고 일컫는데, 안동시에서 북쪽으로 28km 떨어진 도산면 토계동에는 사적 170호인 도산서원이 있다.
도산 서원은 본디 이황이 만년인 조선12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세운 서당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서당이 서원이 되었다.
1575년인 선조 8년에 임금에게서 받은 사액 곧, 한석봉이 글씨를 쓴 현판이 지금도서원에 걸려있다.
옛날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기를 소원 했던 곳이고 지금도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퇴계 성품처럼 깔끔하고 정갈한 서원 안팎에는 그가 아끼던 살구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다.
이 서원에는 보물로 지정된 전교당과 상덕사 그리고 도산서당, 용운정사, 동광명실, 서광명실, 장판각, 옥진각과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잇다.
이황이 쓰던 베개, 빗자루, 명아주 지팡이 문방구 같은 것이 옥진각에 진열되어 있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은 태백산과 함백산에서 흘러 내려오던 때의 맑음을 잃고 아름다운 아름드리 소나무도 많이 사라졌다.
퇴계는 1501년11월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계리에서 진성이씨 가문의 아버지 이식과 어머니 춘천박씨 사이에서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퇴계를 임신 했을 때 공자가 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주자 집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 문을 성림문이라 하는데 노송정에 퇴계가 태어난 태실과 함께 지금도 남아있다,
조부 이계양이 온혜로 터를 잡은 것은 자연 풍광이 마음에 들어 고갯길에서 잠시 멈추고 있을 때, 지나가던 승려가 풍수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의 노송정터가 귀한 아들을 낳을 곳이라 예견해 주어 여기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퇴계는 성리학의 거유지만 참으로 따뜻하고 겸손하며 배려심과 인간미가 넘치고 또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 잠심완미 할 수 있는 글과 행동을 보며 진짜 이런 성현이 계실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론으로 가르침 보다는 일상의 실천적 삶에서 자연스레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주향백리, 화향천리, 인향만리“라는 말이 있다.
‘좋은 술 향기는 백리를 가고 향기로운 꽃내음은 천리를 가며, 인품이 훌륭한 사람의 향기는 만 리을 간다는 뜻이다.’
이는 퇴계를 두고 한 말이리라.

자연인 아버지로 남편으로 선생으로 일상적인 삶을 들어보자.

부부는 서로를 손님처럼 공경해야 한다.
퇴계는 21세 되던 해에 영주에 사는 동갑내기 김해 허 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불행하게도 허씨부인은 27세 되던 해에 이준과 이채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나이 서른에 재혼한 상대는 안동권씨 권질의 딸이었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인이었다.
대단한 명문가 여식이었지만, 할아버지 권주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고 이어 할머니 고성이 씨도 남편의 소식을 듣고 자결 하였다. 또한 작은 아버지 권전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가 2년 뒤인 1521년 신사무옥으로 곤장을 맞던 중 형장에서 숨을 거둔 것이고, 아버지 권질의 유배 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런 권 씨 부인의 이야기가 야사로 전해진다.
퇴계의 조부 제삿날 제사상에서 배를 집어 얼른 치마 속에 숨겼다. 경건하고 신성한 제사음식에 손을 댔으니 이구동성으로 잡음이 생겼을 때 “조부께서 귀여운 손자며느리인지라 크게 노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는 말로 지혜롭게 수습했고, 권씨부인을 나무라지 않고 손수 배를 깎아 잘라 주었다고 한다.
퇴계의 이런 태도는 질타대신 포용하고 배려하는 최상의 인품을 보여준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
퇴계의 제자 가운데 이함형(1550~1586)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전라도 순천 출신으로 부인과 금실이 좋지 않아 혼인을 하고도 동침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퇴계가 제자에게 건네 준 편지 내용에는 공자가 이르기를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뒤에 예절과 의리를 둘 곳이 있다.” 라는 고전의 글귀를 예를 들어 타이르니 이함형이 크게 깨달아 부부는 금실이 좋아지고 후손도 번성하여 뒷날, 퇴계가 세상을 뜨자 친 자식처럼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관습은 관습일 뿐(평등사상)
둘째아들 이채는 혼인을 하고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22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는 “열녀불경이부”라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던 터라 둘째 며느리의 개가는 생각할 수 없을 때였다. 그러나 퇴계는 겨우 스무 살 넘은 과부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남, 여 구분 없이 사람을 아낀 평등사상 이다.

사락정
퇴계의 학문적 특징은 실천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학문적 이론에 몰두 하였지만, 실천유학을 구현하는데 힘을 쏟았다.
백면서생이 아닌 백성들의 삶, 농사일을 중시했다.
장인 권질이 초당을 짓고 사위에게 작명을 부탁하니 ‘사락정’ 이라 이름 하였다.
네가지 즐거움은 농사짓기, 누에치기, 고기잡기, 땔감하기이다.
일반 백성들이 큰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을 양반인 장인에게도 권하면서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가야하는 제가야말로 가장의 기본의무라라고 생각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예로써 존중하다.
소수서원근처 배점마을에 사는 배순이는 서원에 와서 뜰에서 청강을 하곤 했다. 유심을 지켜 본 퇴계는 배순을 불러 시험 해 보니 강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장장이 배순에게 배움의 길을 터 주었다. 그 은혜로 배순은 퇴계가 세상을 뜨자 삼년 복을 입었으며 매일 퇴계철상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천민의 신분으로 조선의 대유 퇴계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제자명단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경우다.

끝으로 26살이나 어린 고봉 기대승이 제기한 학술 논쟁을 무려 8년이나 지속 되면서 퇴계가 보여준 겸손함과 포용심은 조선의 큰 스승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산도 허물어져 낮아지고,
돌도 삭아 부스러지겠지만,
퇴계선생의 명성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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