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헌정 앨범.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오래 전 우리 곁을 떠난 한 젊은 가수의 목소리에서는 늘 바삭하게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뼈와 살 사이에 별 진기가 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광대뼈까지 조금 삐져나와서 어느 모로 보나 세속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사람이 밥을 떠나 살 수 없지만 오히려 밥을 쫓는 그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묘한 설움 같은 것으로 다가들기도 했다.

남자는 나이 서른셋에 아내와 발달장애 딸아이를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의 끝을 정할 만큼 그는 그의 삶에 당당했을까. 그의 죽음을 보며 마지못해 산다는 건 어쩌면 주어진 생에 대한 지난한 미련이 아닌, 오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타 하나에 목소리 하나면 그의 노래에 훌륭한 반주였다. 무엇인가로 긁어 스크래치 난 허스키 음색으로 생의 고뇌와 사랑의 아픔을 노래할 때면 언제나 하늘에선 축축한 비가 내리고 드러누운 듯 땅엔 낮은 바람이 불었다. 어쩌다 고음을 낼 때 앙다물어지는 입, 청중을 향해 이야기하며 한번 씩 천정을 쳐다볼 때면 눈가에 고이던 약간의 물기. 조금 헝클어져 보이던 곱슬한 머리카락,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에 느슨하게 맨 넥타이 하나면 무대복으로 충분했던 가수 김광석.

가사 한 줄 한 줄 읊조리며 뱉어내는 그의 노래는 때에 따라 약간 건조하기도 하고 촉촉하기도 했다. 서른을 갓 넘긴 남자는 에둘러 서른 즈음을 청승맞게 노래했고 겨우 서른을 넘긴 나이에 육십 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지레짐작 절절하게 불렀다. 영원히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사랑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무너져 갈 때 그의 눈은 허공을 향해 한 번 더 깜박였고 세월에 실려 떠나가는 청춘과 매일 하는 이별이 서러워 남자는 조금씩 눈물을 더 뱉어냈다.

그가 노래하는 인생은 지나치게 슬펐다. 그가 노래하는 사랑은 지나치게 아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슬픔과 아픔을 미리 잘 알기에 기대 없음이 주는 담백함에 오히려 아픔이 덜 하리라는 안도 같은 것이 있었다. 과한 희망과 기대는 무너졌을 때 절망이 배가 되지만 미리 알고 짐작하는 사랑의 아픔과 삶의 슬픔은 오히려 관조하는 여유를 주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그의 죽음을 들었을 때 나는 먼저 슬픔보다는 배신감을 느꼈다. 언제나 우리에게 사는 것 별거 없다고, 사랑도 그러하다고 다독이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토록 삶과 사랑에 미련을 두었을까 싶어서.

이즈음 그의 일생이 한 기자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의 죽음이 다시금 파헤쳐지고 있다. 수많은 의혹들이 재조명 되고 그의 가족들은 묻어 두었던 상처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물론 발달장애를 앓았던 딸의 죽음까지 함께. 놀랍게도 그 의혹의 선두에 그의 아내가 있다. 세속적인 잣대와 시선은 한 사람의 삶을 끌어 내리고 헝클어뜨리기에 더 없이 좋은 도구가 된다. 그의 노래가 아무리 오랜 시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가 했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적셔도 통속적이고 사적인 사연과 곡절 앞에서는 한 낱 무위한 것이 될 수도 있기에 우선은 두렵고 안타까웠다.

한 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매스컴에 나와 세상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 그를 이야기한다. 아니 그의 사랑을 모독하고 있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아이의 죽음마저 숨긴 채. 그녀는 그의 이름을 이제와 다시 부르는 건 ‘돈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그의 죽음의 끝에는 돈까지 매달려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가 통속을 벗어나서는 어떤 사명도 명분도 없는 것일지라도 그가 애써 비껴가고자 했던 통속으로 인해 이제 와서는 더없이 비루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80~9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에는 특별한 감정의 여울이 흐르고 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인 회오리 속에서 마음에 남은 상흔은 개인은 물론 대한민국 역사에 화인 같은 깊은 아픔이다. 그런 시절에 그의 노래는 그 상처를 말려주는 햇살이었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상기한 것일까. 단순히 불운한 한 남자의 삶에 대한 동정이나 호기심은 아닐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움 때문이다. 그렇다, 가슴을 적시고 마음을 달래준 그의 노래에 대한 그리움 때문 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라져가는 애수, 무디어져 가는 감성, 낮달처럼 짧게 머물다 가는 이 시대의 가벼운 사랑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운 것이 자꾸 사라져 가는 세상이다. 무엇인가를 남기는 게 오히려 상처가 되고 과오가 되는 세상이다. 잊지 않으려 녹음 된 목소리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닌, 이별이 불리할 때 증거가 될 뿐이고 때론 애틋하고 때론 열정적이었던 사랑의 영상은 치부가 되고 멍에가 되어 한 사람 인생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무력이 되기도 한다. 사랑했던 날들은 집착의 뿌리가 되어 연인의 미래를 비틀고 한 순간에 모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함께 한 시간은 때때로 치욕의 불길 속에서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그런 시간과 기억 속에서 그리움은 어느 쓸쓸한 구석에서 구겨진 휴지처럼 뒹구는 전설 같은 단어일 뿐.

이주옥(수필가)

가버린 것은 보내주고 잊어주는 게 순리이고 예의다. 사랑을 노래하고 이별을 다독였지만 우리가 잊지 않고 붙들고 있음으로 그가 더 없이 초라해지고 있다. 사는 동안 수없이 써서 부친 연서는 수취인 불명으로 배달되지 못하고 그가 애타게 부른 사랑의 노래는 누군가의 방문 앞에서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객처럼 쭈뼛거리고 있다. 나는 이 밤 이제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다. 이제 그만 그를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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