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청첩장이 귀한 시대라고 한다. 불과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봄가을이면 밀려드는 청첩장에 가계가 휘청거릴 정도라는 푸념을 했다. 하지만 요 근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결혼 기피 현상이 만연하면서 결혼 청첩장이 귀해졌다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판세가 갸우뚱해지면서 일어난 기현상이다.

예전엔 결혼적령기가 있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남자는 스물일곱에서 서른 사이가 적령기였고 여자는 스물네다섯 살이 가장 꽃다운 나이라고 하며 일명 금값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때를 놓치면 배우자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자칫 정체성에 문제 있는 애물단지로 치부되기도 했다. 또한 혼기 찬 자식을 둔 부모는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며 마치 처치 곤란한 골동품이라도 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적령기라는 단어는 무색해지고 남자나 여자, 초혼의 나이도 대폭 상승됐다고 한다. 남녀 불문, 서른 살 이전은 이른 결혼이 되고 마흔 살을 넘긴 독신자들을 어디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이제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고 부모가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도 한계가 없어진 듯하다. 여성들의 고학력으로 사회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경제적으로 남성 의존에서 벗어난 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면, 사회 깊숙한 곳에 도사린 남녀 혐오 사상이 가장 현실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깝게는 내 자식부터 고만고만한 나이의 친구들 자녀도 하나같이 결혼을 거부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의지로 결혼과 비혼이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나 또한 비혼을 선언하는 딸아이에게 흔쾌하게 그러라고 하지만, 내심으로는 불가항력의 인연설에 기대며 그 호기에 코웃음 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결혼은 꼭 강요할 일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세상 돌아가는 판세에 편승한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경험자인 나 또한, 결혼이 주는 비합리에 일부 수긍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비혼은 비단 개인의 인생사에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인구 절감에 국가적 존폐위기는 물론, 인류 공영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더구나 그들 비혼의 이유가 ‘행복해지기 위함’이라니 더욱 슬프지 않은가. 청년들의 비혼과 늘어나는 이혼, 그에 따른 인구감소 등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춤 인 듯해서 불안하고 위태롭다.

이런 현실에 편승한 걸까. 요 근래 비혼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고 정식으로 청첩을 하고 지인이나 친구들은 기꺼이 축의금 봉투를 지참하고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축하한다고 한다. 유행이나 문화처럼 일시적인 현상이길 바라는 면도 없지 않지만 어쩌면 이런 추세는 꽤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싶다.

태어나서 사는 동안 순서대로 일어나고 진행되는 일들은 누구나 거의 비슷하리라. 태어나 교육기간을 거치고 사회에 뛰어들어 경제 활동을 하고 그리고 성혼하여 자식을 낳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긍정적인 순환이라고 여기는 것, 하지만 꾸준히 이어져왔기에 그것은 수순이 되고 일반적인 관념이 되고 순리가 되었을 뿐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기에 당혹스럽다. 그동안 각인돼 있던 관념이나 형식이 깨지고 부서지면서 모두가 우왕좌왕 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체념을 하고 인정을 하고 인식이 되면 또 그것이 순리가 되고 진리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또 현실에 적응하리라.

각자의 인생은 스스로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무엇도 강요할 수 없고 단순하게 옳고 그름 속에 끼워 넣을 수는 없다.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결정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생의 운용일 것이다. 일단 지금은 따로 비혼이나 이혼이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각자의 인생 플랜에 결혼이 끼어 있지 않다고 해서 잘못이거나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것이다. 아마 우리들 기성세대가 순리라고 믿는 것을 따르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다른 것을 위해 젊은이들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인생 플랜에 결혼이 빠졌을 뿐.

그저 우리의 할 일은 그들을 신뢰하며 응원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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