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말은 소통의 가장 확실한 매개다. 하지만 말에도 기술이 있고 효과가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말로 표현하는가에 따라 결과와 위상이 달라지는 일은 흔하다. 얼마나 조화롭고 합당한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명분이나 응원군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간혹은, 행위나 성격을 도를 넘은 조롱으로 빗대 돌아 올 수 없는 관계의 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바쁜 시대에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글이 새삼 환영받는다. 장설長舌은 흥미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설득력도 반감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시대의 조류가 달라지고 있다. 급기야는 다섯 장짜리 소설도 등장했고 두어 줄로 표현한 강렬한 시가 대세다. 이때, 자극적인 말이 임팩트라는 범주에 들어가 그런 표현들이 당위성을 갖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휩쓸려서 사람이나 행위에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비천한 존재가 되고 있다.

난데없이 벌레들이 난립한 세상이 됐다. 식당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아이를 동반해 주위를 산만하게 하고 단속하지 못하면 ‘맘충’이라고 부른다. 원 뜻은 타인을 위한 배려가 없거나 무개념인 엄마들을 지칭 하는 말이지만 자칫 아이를 동반한 모든 엄마들에게 적용되어 조금 안타까운 신조어가 됐다. 또한 무엇이든 진지하게 설명하려 드는 사람을 ‘설명충’ 또는 ‘진지충’이라고 한다. ‘진지하다’를 사전으로 찾아보면 참답고 진실하다는 뜻이지만 현실에서는 말이 많고 따분한 벌레로 비하된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뭐든 대충 넘어가는 사람이 시크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다. 적당히 장단 맞추고 눈치껏 넘어가는 것이 세련 된 처세술이고 벌레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또한 매사 안개처럼 희뿌연 세상에 재밌고 가볍고 감각적인 것이면 환영하고 진지는 무겁고 부담스러우니 삼가달라는 얘기다. 급기야는 그나마 한마디 말도 필요 없으니 이모티콘 기호로 대신하자 한다.

한국적 가부장적인 행동이나 사고를 가진 남성들을 ‘한남충’이라고 부른다.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는 유교적인 사상이나 교육에 젖어 지아비를 받들어 모시던 우리들 할머니나 어머니 세대를 오늘날 페미니즘에 혼돈을 일으킨 원인제공자들이라고 원망한다. 그러다보니 젊은 남녀는 서로를 혐오하고 사랑을 외면하고 결혼을 거부한다.

지하철에서 경로석에 앉아 가는 연세 드신 어른들에게는 ‘틀딱(틀니를 딱딱거린다는 의미)충’이라고 이름 붙여 순식간에 벌레로 만든다. 내가 나이 들고 늙어갈 것 모르는 젊음에 대한 만용이고 치기다.

의학 전문대학원 나와 의사가 된 사람들을 비아냥대는 의전충, 농어촌 전형이 포함되는 기회균형 선발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기균충’, 지역균형 선발을 비하한 ‘지균충’이란 말도 있다. 일베충, 무뇌충, 페북충…. 기발한 조어 기술에 혀가 내둘러 질 정도다. 앞으로 더 새롭고 자극적인 이름을 가진 인간벌레들이 무작위 출현할 것이라 생각하니 결국 이 세상을 벌레들이 이끌어 가지 않을까 싶다.

철학자 빅터 프랭클은 ‘더 이상 의미를 묻지 않는 세상은 영혼 없는 전문가들로 넘쳐나게 된다.’고 말했건만 어쩌다 미물인 벌레들에게 세상을 내어 주었을까. 기다림도 배려도 양보도 의미 없어진지 오래다.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나도 무작정 세상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간다. 속도와 변화에 휘말려 멀쩡한 사람이 벌레 되는 세상이다. 감히 사람에게 벌레란 별칭을 부여한 배후 주동자는 이 시대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자본주의를 불러일으킨 마키아벨리의 영악한 후예들. 돈에 얽매어 인간성과 감성을 등한시 하고 문명에 무작정 편승한 죗값치곤 너무 비루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는 제각각 역할이 있고 가치가 따로 있다는 거시적인 논리 이전에라도 근원도 알 수 없는 내 맘대로 조합의 단어를 만들어 인간이 인간을 모멸하며 다분히 벌레로 전락시킬 수는 없다. 어차피 인간과 벌레는 공생의 관계라지만 그렇다고 벌레처럼 꿈틀거릴 수는 없는 일, 인간으로서 보다 차원 높은 사고와 품위로 굳건한 자리 확보는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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