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쌀은 물론, 다양한 과일 및 채소의 수확이 끝나고 집집마다 곡간이 가장 배부를 즈음이다. 봄여름 내내 땀 흘리고 가꾼 먹거리들이 단맛을 들이고 토실하게 살찌우기를 끝내고 제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나름대로 밥값을 하는 때다. 토양에 거름을 주고 바람과 햇빛과 물을 흠씬 들이킨 것들은 저마다 탐스런 것들로 성장을 해 농부들에게 수확의 기쁨을 안겨줬다.

나는 유난히 흙 속에서 자란 뿌리채소에 욕심과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나중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꼭 텃밭을 가꾸리란 다짐을 한다. 그 중 감자, 고구마, 토란은 빼지 않고 심어 볼 요량이다. 어릴 적엔 여름이 끝나는 즈음에 엄지손가락 크기만큼 자란 햇고구마가 맨 먼저 가을을 알렸다. 명색이 시골 출신이지만 한 번도 농사를 지은 적이 없었던 터라 장에서 사다가 쪄준 아기 주먹만 한 빨간 밤고구마는 나름대로 어머니의 가을 선물이었다. 

밭농사를 제법 크게 지었던 시골 큰댁은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를 안방 한쪽 구석에 대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천정에 닿을 만큼 쌓아 놓았다. 어린 눈에도 너무나 부러웠고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풍경이었다. 큰아버지께서 지게에 져서 날라다 준 고구마 한 자루. 그것은 긴 겨울 요긴한 군것질거리였다. 가마솥에 밥과 함께 찌면 밥풀이 잔뜩 묻어났고 다 익었을까 젓가락으로 찔러보면 끈적끈적한 단물이 묻어나곤 했던 고구마가 새삼 그리워진다. 또 납작하게 썰어 찬바람에 꾸덕꾸덕하게 말린 고구마 말랭이는 얼마나 별미였던지. 예전의 고구마는 밤 맛이 나는 밤고구마가 있었고 너무 말랑해서 입으로 쭉 빨아 먹어야 되는 물고구마, 그리고 생김새도 투박하고 맛도 무맛이 나는 무광고구마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고구마는 품종개량이 돼서 각양각색의 이름과 맛으로 브랜드화 됐다. 색깔도 샛노랗고 맛도 달콤한 호박 고구마, 그보다 달콤함이 한결 더해진 맛이라며 이름 붙여진 꿀 고구마, 그리고 영양 면이나 색깔에 혁신적인 자색 고구마도 있다.

예전의 고구마는 단순히 구황작물이었다. 곡식이 부족한 시절에 밥 대신 흔히 먹을 수 있는 요깃거리였다. 또한 줄기나 잎도 버리지 않고 나물로 해 먹었다. 하지만 요즘은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되면서 사람들에게 건강에 유익한 식품으로 각광 받는다. 먼저 섬유질이 풍부해서 변비나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또한 다이어트나 심지어 항암효과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피자나 햄버거에 입맛들인 아이들은 아직도 엄마가 억지로 먹여야 하는 음식 중 하나다. 스무 살을 훨씬 넘긴 우리 아이들도 우유에 꿀을 섞어 달콤한 스무디로 만들어줘야 그나마 인심 써 주듯이 겨우 먹어 준다.

예전엔 수확 철이면 망태기나 양재기에 담아 격의 없이 이웃과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젠 과자나 케잌의 재료로 쓰이고 가격도 엄청 비싸다. 특히 건조기를 이용해 먹기 좋게 말린 말랭이는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꽤 높은 가격으로 사람들의 손을 탄다. 재작년 지인이 선물로 보내준 말랭이를 해외여행 중에 아주 요긴하게 먹은 기억이 있다. 시골마당에서 천연의 바람이나 햇살에서 말린 적당히 먼지 묻은 허드레 말랭이는 아니지만 추억 속의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은연중에 복고로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바로 먹거리다. 특히 자극적이고 서구적인 먹거리에 홀렸던 사람들이 예전 우리 음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알게 된 듯하다. 우리 음식의 의미가 재인식되고 있어 반가운 현상이다. 특히나 건강이 화두가 되고 다이어트가 필수인 시대에 그 효능과 가치가 재조명되는 고구마는 그 선두주자가 아닐까 싶다.   고구마가 푸짐한 즈음이다. 마트에는 동글동글 길쭉길쭉 모양도 어여쁜 고구마들이 망태기가 아닌 상자에 담겨 자태를 뽐내고 있다. 취향대로 골라서 사 먹을 수 있다. 단순히 찌기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굽고 튀기고 말려져 우리들 마음과 입을 즐겁게 한다. 굳이 조목조목 영양학적인 효능을 따지지 않아도 고구마는 그 이름만으로도 더 없는 따뜻함이고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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