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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에 관한 단상
  • 이주옥
  • 승인 2019.01.2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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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모처럼 휴일에 집에 있는 아이들이 간식으로 치킨을 먹었다. 대부분의 인스턴트 음식들이 그렇듯 강렬한 흡입의 즐거움이 지나면 느끼하고 더부룩함이 후유증으로 남는다. 자연히 속을 개운하게 할 후처방이 필요하다.

문득 오랜 날 냉장고에서 말 그대로 찬밥신세가 되어가는 밥 한공기가 생각났다. 냉기에 마르고 있는 것을 꺼내 채반에 바쳐 찬물 샤워를 시켰다. 어느 베테랑 세프가 알려준 누룽지 만드는 방법이다. 냉장고 안에서 진기를 잃은 지 오래지만 또 한 번의 물세례를 받아 남아있을지 모르는 찐득함을 마저 털어낸다. 냉장고에서 방치된 서러움을 나누며 딱딱하게 굳어가던 밥 덩어리는 선득한 찬물 세례를 받고 낱알로 독립한다. 굳은 채 엉겨붙어있던 밥이 풀어지고 불기운에 풀어져 부드러운 누룽지 한 보시기가 되려면 찐득함은 기존의 것에 대한 미련이고 반항일 뿐이다.

풀어진 찬밥은 물기 털리고 널찍한 프라이팬에 골고루 펼쳐진다. 이제 불 조절이 관건이다. 너무 센 불에서는 이내 새카맣게 타버린다. 그러니 시원찮다 싶을 만큼 약한 불에 오랜 시간 달구고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관계도 무작정 열정적으로 다가가 급격히 뜨거워지면 오히려 마찰이 생기고 트러블이 생기기 마련,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다시 모이고 엉켜짐으로써 친밀도를 높이고 적당한 색깔을 갖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소한 맛과 농도를 가진 관계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타다닥 거리는 소리가 제법 정다운 음률을 이룬다. 고소한 냄새도 풍겨 나오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낱알로 떨어져 온전히 하나의 개체가 돼서 바닥부터 서서히 익는 시간을 거쳐내고서야 마침내 서로의 찬 속을 달래는 인연이 되는 것이리라.

뜨거운 불기운을 견디고 그러다가 온 몸에 뭉근한 화상을 입고 드디어 연갈색 누룽지 한 판이 실팍한 몸체를 들어올린다. 누군가에게는 와사삭 씹혀 고소한 주전부리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씹어 버리고 싶었던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들이 부은 술기로 생긴 속 쓰림이 걸쭉한 풀기에 내장을 감싸고 달래주니 종일 치받치던 고약한 심사까지도 잠이 들것 같다. 앵 토라진 서울여자 같던 딱딱한 누룽지 한 조각이 듬쑥하고 속정 깊은 촌 아낙 같은 뜨듯한 누룽지 한 사발이 된다. 거기에 김치 한 가닥 얹어 삼키면 결기차고 맵싸한 감정도 눈 녹듯 사라지고 그대로 목 넘김만 해도 구수함이 반찬이 되니 만만하기 그지없다.

거대해 보이는 삶도 자잘한 기억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간혹은 부스러기 같은 잔정에 생애 전부가 오락가락 하기도 하는 것처럼, 식은 밥 한 덩어리가 꺼질 듯 사위는 잔불에 노릇하게 익어 제 몸을 굳히고 색깔을 더한다. 세월에 닳은 달챙이 숟가락으로 솥바닥에 실금이 생기게 긁히는 아픔도 감행한다. 피차 서로 긁히고 부서지는 균열을 이긴 끝에 탄생한 누룽지조각. 밥 서너 숟가락 눌렸다가 뜨끈한 누룽지 두세 보시기로 늘리는 마술을 부린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나이든 인기가수의 주식이 누룽지였다. 아무런 반찬도 없이 후루룩 마시고 마는 누룽지 예찬에 젊은MC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햄버거니 스파게티니 강렬하고 색다른 음식이 지천인데 밍밍한 누룽지라니. 하지만 그 밍밍함 속에 감추어진 고소함을 어디 비할 데가 있으랴. 고기 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누룽지는 된장찌개와 함께 나오는 밥 한공기와 서열 다툼에서 밀리지 않는다. 기름기 가득해진 속을 씻는데 그만큼 무자극적인 식품이 어디 있을까.

어느 때부터 밥이 부식이 돼가는 느낌이다. 밥은 자주 밥솥에서 진기를 잃고 맛을 잃고 천덕꾸러기처럼 방치된다. 그런 탓일까. 찬물에 씻기고 뜨거운 프라이팬에 한 번 더 구워져 누룽지로 변질 된다고 달리 저항하지도 않는다. 또 한 번 끓임을 당하는 파행 속에서도 인간의 속을 채우고 달래는 본질은 그대로다. 그 묵직한 결기가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밥의 원천을 믿고 누룽지로라도 힘을 내고 쓰린 속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이주옥  leejo9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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