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기를 안듯 우리는 저마다의 상처를 안는다. 비탄의 회랑을 걷는 짧은 기도와 한숨 속을 퍼지는 진언 속에 우리의 한 생애가 누군가와 만나고 우리는 그 사람을 안으며 그의 생애를 안는다. ’ 김재진의 시 ‘포옹’의 일부다.

얼마 전 지하철 역사에서 술에 취해 경찰과 실랑이 하던 남성을 포옹하는 청년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청년의 따뜻한 인성에 감동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다고 말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행위를 미처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하는 반성이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은 피동적인 사람이 누구고 수동적인 사람이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와 형편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추운 사람을, 무언가에 분노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그의 감정을 순하게 다독이며 가라앉혔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뿐이다. 나는 그 순간 새삼스럽게 포옹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포옹한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포옹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진심과 친밀이 함께하는 몸의 언어다. 아우르고 보듬는다는 의미다. 외부적인 갈등과 분노와 흥분이 내부적으로는 녹아들고 가라앉고 풀어짐을 뜻한다. 분열이 화합이 되고 대립이 융화되며 냉전이 종식된다. 그 매개는 용서와 화해이며 바닥에 깔린 것은 더없는 따뜻함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흔히 몸을 굽혀 인사를 한다. 누구는 악수를 한다. 또 어떤 이는 와락 껴안는다. 그때 서로에게 전달되는 공통점은 호의에 찬 눈빛이며 미소다. 더욱이 포옹은 체온까지 더해지니 한층 더 친밀감을 느끼는 최상의 교류행위가 아닐까.

그날 술기운을 빌어 횡설수설 하는 남자어른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청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아버지나 형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때 자신의 모습을 봤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궁극으로는 인간애였을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행위 앞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성찰을 했던 이유는 바로 삶이라는 여정에서 생기는 공감이었을 것이다. 한세상 함께 살아가는 타인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의미 말이다. 우리는 남의 아픔을 보며 나의 아픔을 떠올리고 남의 절망을 보며 내 절망의 순도를 체크하고 거기서 결국 희망을 건져 내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이 함께 세상이라는 거대한 강물을 건너는 방법이리라.

녹록치 않은 세상에 대해, 지난한 인생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 하소연하고 울분을 토해내고 싶겠으나 대부분은 가슴에 삭이면서 품고 살 뿐이다,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에게 위로받은들 뭐 그리 자존심 상할 일인가. 진심을 다해 따뜻하게 포옹하며 다독여 주는 손길에 위로 받으며 나의 본성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난 솔직히 꽤 독선적이고 제 잘난 맛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에 품은 것들을 쉽게 표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때때로 날카롭고 뾰족한 비난에 상처 받기도 하고 근거 없는 억측에 마음 다치기도 했지만 무던한 척, 씩씩한 척 했다. 반면 누군가의 아픔이나 상처에도 선뜻 다가가서 위로하지 못했고 무심했다. 가족마저도 온 마음 다해 포옹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위로가 필요했다. 특히 나의 부족함과 불찰을 다 이해하고 감싸 준다는 의미의 깊은 포옹은 더더욱 절실했으리라. 누군가를 껴안는다는 것, 비단 몸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위까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보듬어 주는 포옹이면 얼마나 따뜻하고 힘이 되는 응원 일텐가.

싯귀처럼, 따뜻한 포옹하나로 타인의 생애 전체를 다 껴안을 수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순간의 아픔과 절망에 용기를 주고 위로는 되지 않을까. 관계에 가로놓인 모든 거리를 순식간에 잡아당겨 좁히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서로를 향해 발을 떼고 몸을 가까이 하면서 마음을 겹쳐보는 것, 그런 포옹의 시간 속에서 삶은 조금 더 따숩고 수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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