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특별반으로 ‘고전읽기’가 있었다. 짙은 초록색 표지로 된 책에는 홍길동전이나 춘향전 같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때로는 링컨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인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위인 전 속의 그들 삶은 너무 남다르고 대단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랬기에 위인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들여다 본 타인의 삶은 알게 모르게 내 의식이나 신념에 영향을 끼쳤다. 그 책들을 읽으며 국가와 민족에 업적을 남기는 위대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내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않아야겠다는 의식은 깨쳤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방법이나 방식이 있다. 작게는 나만의 아집부터 크게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무언가다. 그것들은 타인과의 관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줄 뿐만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태중에 있는 자식에게 음악이나 동화를 들려주면서 태교를 하고 늘 좋은 것을 보여주고 좋은 영화나 책을 읽히며 자식들의 인성을 다듬고 꿈을 키워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일 게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그 책 속에서 특출 난 사람으로서 이미 싹을 틔우기도 하고 더러는 사는 중에 이런저런 경험과 교육에 의해 소신을 세우고 주관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아픔이었든 환희였든 자신의 인생에 도래한 갖가지 일들이 신념과 철학의 바탕이 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광고가 귀에 선명하게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자기 소신이나 주관 없이 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하면서 또한 충격적인 문구였고 그 문구 때문에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지표를 다시 매만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시대의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위주의 삶을 살아간다. 홀로서기라는 단어만 봐도 괜히 두렵고 걱정이 많던 시절에 비하면 1인 세대 혹은 홀로 족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혼자의 삶에 익숙하다. 결혼이나 출산도 남의 시선이나 강요보다는 철저하게 본인들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기성세대들은 개인주의니 이기주의니 하는 말로 염려하고 질타하지만 나는 확고한 소신을 펼치며 야무지게 자기 몫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러울 때가 많다. 적당히 배려하고 양보하며 나만의 소신이 자칫 트러블메이커로 확장될까봐 눈치 보며 살아온 세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한 똑 부러지게 사는 사람들도 분명 허점이 있고 무엇인가 허기는 있을 터, 그리하여 사람을 그리워하고 의지할 어떤 대상을 찾는다. 의지처의 대상은 다양하다. 어떤 동호회도 있고 책 또는 음악이나 스포츠도 있을 것이다. 한 줄의 글, 멜로디 한 소절, 영화 속의 풍경이나 대사 한 마디에 용기를 얻고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미진한 자신의 삶에 양분으로 삼는다.

나는 특히 에세이나 시를 읽으며 글 한 줄에 공감하고 희망을 얻을 때가 많다. 딸아이는 혼자 영화 보기를 즐기고 감명 깊은 영화는 두세 번도 보며 제 안의 허기를 채운다. 거기에서 다양한 공감력을 얻고 저만의 특별한 의식을 구현하지 않나 싶다. 물론 그 확고한 의식이 가끔은 나와 마찰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제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고 제 길을 개척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요소가 됐다고 믿는다.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어떤 신념을 갖고 사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나의 신념은 ‘나답게 살 되, 조금 더 아름답게’다. 나의 삶을 잠시 뒤돌아보면 나답게 사는 것에는 그럭저럭 고개 끄덕이지만 아름답게 살았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최소한 어떤 삶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늘 고민 하고 지향하리라는 것이다. 철학 있는 삶은 분명히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에 단단한 기반이 된다. 안팎으로 갈등이나 공격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을 지지대다. 나의 철학으로 꾸려가는 나의 삶, 결국 그것이 온전한 내 인생의 든든한 양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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