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경일보 이주옥(수필가)]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자기도취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잘못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랑은 자기애로부터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자기만족이 없다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 살아가는 게 얼마나 더 버거울 것인가.

나 또한 적당히 내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내 삶의 방식과 주관적인 관념을 고집하는 면이 있다. 그러다 보니 때론 남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기대하면서 마찰을 빚기도 하며 상대방의 빈축을 살 때도 있다. 그런데 난 요즘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이 꼭 완전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간혹 사람들 몇이 모여 앉아 남의 재력이나 복락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러면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때가 허다하다. 어쩌면 거기엔 내가 못 가진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이 포함됐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재물보다는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산다는 말로 자기 위안을 하고 마무리를 하곤 했다.

내 젊은 시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까닭에 잃고 포기한 것이 많았다. 이런 나에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려줬던 말은 인간만사 새옹지마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참으로 무책임한 언어의 유희라고 실소하며 콧방귀 날렸다. 일확천금이나 천재일우(千載一遇)처럼 막연하고 다분히 뜬구름 잡는 헛된 꿈인 것 같아 허망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 막연한 희망으로밖엔 내 삶이 나아질 것이 없다는 말인 것 같아 더 비루함을 느꼈다. 그랬기에 희망보다는 다소 절망 쪽에 가까운 사고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분명 삶의 지난함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는 말임엔 틀림없는데 말이다.  

주위엔 모든 것을 다 가져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적인 여유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지위, 잘난 자식들, 심지어 건강까지도 두루 가진 사람들. 태생자체가 신의 축복을 몽땅 받은 사람들인 것 같아 범접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물론 외모나 재복 등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그런 것들을 갖기 위해서는 분명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명 그만큼 치러야 했던 대가도 많았을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선 국내 굴지의 대기업 비리에 관한 보도를 어느 때보다 자주 한다. 지금의 위상과 재력을 갖기 위해 저지른 비리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서민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고 그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금전들이 건네졌던 정황들.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새삼 떠오르는 실상이다. 나는 여태껏 많은 재물을 가져본 적이 없다. 또한 많이 갖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한 적도 없다. 오히려 물리적인 재물보다 그 이상의 무엇을 추구한다는 허세를 부리며 안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내 빈한함이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상에 많은 재물은 최상의 지향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 대부분은 재물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은 분명하기에.  

얼마 전 사회초년생인 아이와 함께 백화점 순례를 했다. 거기에서 난 노골적으로 얘기했다. “너 갖고 싶은 것 무지 많지? 이걸 갖기 위해선 돈이 많아야 해”. 어쩔 수 없는 연륜과 경험에서 나온 나의 실질적인 경제교육이었다. 하지만 그 재물 앞에 무너지고 잃어가는 인간성과 도덕성 때문에 결코 온전히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삼키고 말았다. 그때 아이는 어떤 결심을 하고 판단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 또한 아이의 몫이기에.  

정석도 없고 정답도 없다고 말하는 우리의 삶, 오늘도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사람들은 격렬하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세상 앞에서 눈치를 보고 맞서고 상처 입으며 살고 있다. 그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긴 채 말이다. 

저작권자 © 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