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옹윤례.
[검경일보 객원 필자 기고/ 소설가 옹윤례] 차가 멈췄다. 둘씩셋씩 짝을 지어 나오는 무리들이 도로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길을 가로막고 있는데다 빠져나오는 차로 인해 길은 복잡했다.

들판 위의 붉은 풍차가 돌아가고 있는 커피숍과 어둠속에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모텔의 네온사인이 강렬한 빛으로 유혹한다. 차는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주차시킬 마땅한 장소가 없다.

그 때 화사랑 이라는 음식점에서 빨간 넥타이를 한 종업원이 뛰쳐나와 주차시킬 장소를 마련해준다. 여기도 화 사랑이 있네, 분점이나 보지, 그가 핸드브레이크를 세우며 말한다.

“어서 오십시오.” 빨간 넥타이는 꾸벅 절을 한다. 미술관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예, 그러십시오, 빨간 넥타이는 안으로 들어간다.

몰려나오는 사람들 속을 거슬러 올라가자 <토탈 뮤지엄>이라는 나무 팻말이 쓰여 진 야외조각장이 나왔다.

매표구는 이미 문이 굳게 닫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자 나무 팻말 아래 서있던 관리인이 끝났다고 한다.
"잠깐이면 돼요. 뭘 찾을게 있어서 그런데 한 바퀴만 돌고 금방 나올게요."
"우리들 생각도 해줘야죠. 벌써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사람들이 안 나와서 이러고 있잖아요. 추워죽겠는데..." 관리인이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토탈 뮤지엄 안에는 아직도 나무의자나 조각품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모자를 쓴 늙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그들에게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직도 저 안에 사람들이 많잖아요. 금방 나온다는데..."
그가 인상을 쓰며 관리인을 노려본다. 관리인은 그 시선을 외면한 채 뚜벅뚜벅 걸어서 저쪽으로 사라진다.
"그냥 가자."
내가 뒤돌아선다.
"여기까지 와서 왜 그냥 가? 욕망의 무한대를 보고 가야지."
그가 몰래 숨어든다. 어서와, 그가 손짓한다. 누가 볼세라 나도 얼른 안으로 들어간다.

초가로 지붕을 엮은 움막처럼 동그랗게 생긴 카페에서 사람들이 나온다. 지붕 한가운데에 뚫린 굴뚝에서 연기가 부옇게 뿜어 나온다.

"커피숍이야. 자기가 마시고 난 컵을 기념으로 가져가는 곳이야. 컵이 예뻐서 컵을 모으려고 몇 번 온 적이 있어."

얼기설기 짜여 진 천정 틈으로 코발트색 밤하늘이 빠끔히 보인다. 둥근 벽은 빙 둘러 머그잔이 놓여있고, 짚더미 사이사이로 낙서를 한 종이들이 무당의 종이꽃처럼 너울거린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만들어놓은 키 작은 나무 의자와 붉게 타오르는 장작불 사이로 활활 타고 있는 촛불이 보인다. "괜찮은데, 우선 토르소부터 보고 여기서 커피 마시자."

나는 이제 더 이상 욕망의 무한대라는 토르소에 흥미가 없어져 버렸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집착을 보인다. 녹이 슨 철제 조형물과 손모양의 조각들, 말라비틀어진 잔디 위에 드문드문 유령처럼 서있는 조각들. 그는 조각들 앞으로 다가가 일일이 제목을 확인한다. 그러나 녹슬고 흙탕물이 튀겨 제대로 글씨조차 읽기 힘들다. 토르소는 보이지 않는다.

기형학적인 갖가지의 조각들만이 있다. 땅 밑으로 반쯤 들어간 조각과 하늘 높이 치솟은 조각들, 그리고 땅바닥에 길게 누워있는 조각들의 형상, 기이하기까지 한 형상들이다.

"너 가 말한 토르소는 없는데..."
"어딘가에 있겠지. 우리 학교 다닐 때 학교 앞에 토르소란 커피숍이 있었어, 생각나?"
"아니."
"우리 거기서 여러 번 만났는데 정말 생각 안나?"
나는 기다란 조각상에 기댄다. 어느새 어둠이 점령된 주위는 스멀거리는 안개로 인해 축축해진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중간고사가 끝나도 그는 학교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신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서클에서 회식한 적 있지?
그 때 제이 형이랑 너 가 먼저 나갔어. 시내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더라. 나도 뒤따라갔지.
미행한 게 아니라 나도 걷고 싶었어.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가로수 밑에서 너희들이 키스를 하더라. 그리고 그날 밤 너 가 제이 형 하숙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어.
왜 그 얘길 이제야 하는 거야.
몰라. 영원히 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탱자 울타리에 매달린 탱자알들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우연히 도서관에서 제이 형을 만났다.
줄다리기 하지 말고 현우한테 한번 찾아가라.
왜요?

너의 눈빛이 현우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내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젊음은 결코 길지 않아. 금방 지나가지. 이 소중한 시절들을 놓치고 나서 평생 후회하지 말고.

그러나 나는 끝내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나는 졸업반이 되었다. 일 년 먼저 졸업한 그는 취직이 되지 않아 가끔씩 학교 도서관에 나왔다.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면 나는 일부러 피하곤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시 그와 나는 카페 토르소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까 우리의 만남이 조금씩 정리가 돼.
그는 핼쑥해진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우리 만남은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인 것이 먼저 시작된 거 같아.
뭐라구? 넌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나보지? 너 웃기는 구나. 어떻게 정신과 육체가 따로따로야? 난 안 그래. 정신과 육체는 하나야. 어떻게 사랑을 이 분화시켜?
그가 당황해했다.
내가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보통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나서 손도 잡고 키스도 하는데 우리는 그러기 이전에 먼저......
됐어. 넌 그랬나보지. 난 그렇지 않아...... 아냐, 나도 그래. 나도 그냥 불장난 좀 해보려고 했는데 너 가 너무 바보같이 노는 것 같아 그만뒀지. 이젠 됐지? 우리 앞으로 영원히 만나지 말자. 우연히 만나도 안 체도 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고, 서로의 소식을 알려고도 하지 말고......
너, 너, 날 아주 미워하는구나.
나는 졸업을 하고 솜 리을 떠나 빛고을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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